◎일,1887년이후 수로개척… 뗏목 본격 운송/위험한 작업에 상놈 취급·혼인거절 예사/1905년 중·일 목식공사 발족… 주변 임산물 수탈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용강현 이도강촌에는 도망골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다.중국 동북지역을 강점한 일본인들의 산판이었는데,압록강 목재 운송의 기점이었다.그렇다고 도망골에서부터 뗏목을 맨 것이 아니라 벌채한 통나무를 우선 떠내려 보냈다.일본인들이 벌목인부들을 소나 말 처럼 혹사하기가 예사여서 도망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그래서 마을 이름이 도망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 도망골도 그저 한적한 산골마을에 불과했다.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명맥을 유지하던 압록강유역의 대대적인 임목벌채는 물론 뗏목이 서서히 사라졌기 때문이다.해방 이후에도 한동안은 압록강에 뗏목이 떴다.1953년 4월20일에는 중국과 북한이 심양에서 평등호리원칙에 따라 「압록강·두만강 유벌협정」을 맺었다.이어 1977년4월13일 평양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에서의 목재운송에 대한 협정서」를 교환했다.
○문혁이후왕래중단
이들 두 협정에는 벌목 인력의 월경작업과 뗏목의 규격,벌목 노동자의 상호지원 및 구호 등을 규정한 조항이 들어있다.그리고 자연재해와 특수사정에 따라서는 상대국 대안에 뗏목을 붙이고 등록만 마치면 상륙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다.실제 중국과 북한의 시와 현(군)급에서 서로 대표를 파견하여 벌목상의 문제점을 토의했다.그러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왕래가 중단되었다.그 여파는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압록강 수로가 본격적으로 개척된 것은 근대의 일이다.청나라 정부가 목세국을 설치한 1887년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그리고 나서 1902년에는 안동의 상신과 동변도관부가 합작으로 안동목식공사를 세우고 노동력을 고용하여 한해 1만여장의 뗏목을 띄웠다.또 1905년에는 일제가 중일목식공사를 설립했다.이는 압록강 연안 임산자원의 수탈을 본격화한 신호였다.
길림성 집안시 양수향에서 만난 손복상(70)노인은 젊어서 압록강 물길을 누빈 뗏목꾼이다.상류에서 떠내려 보낸 통나무를 떼로 묶어 놓으면 하류의 목적지까지 운송하는 것은 뗏목꾼의 임무다.그러니까 해방 이후 부터 뗏목을 탔다.
『임업국시절이 아닌 이화공사시절이니 끼리 스물두살에 뗏목에 올랐디요.압록강에서도 타고 송화강·흑룡강에서도 뗏목꾼으로 일했수다.서른댓살이 되어 그만 두었댔디요.압록강에서는 임강에서 타가지고 서리 양수향 해관촌에서 내렸습네다.우리 조상은 집안시에 사는 여사신이라는 사람인데,쉰살은 돼보이는 조선족이었디요.그 분은 일제 때부터 뗏목을 탔다고 기래요』
뗏목의 단위는 장이다.1장의 크기는 목재 1백50㎡ 안팎인데 너비 20m,길이 6m 정도가 보통이다.뗏목 1장에 2사람씩 오르고 5장을 1개조로 떠 내려간다.뗏목이 흐르기 시작하면 조장이 선창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화답으로 맞 받았다.그 뗏목소리는 대강 「파도를 헤쳐가자/물에 떠서 가자/노를 잡아라/잡았다네/힘을 내라/헤에야/잘도 간다/헤에야/갈구기 걸어라/헤에야…」라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수입은 그래도 낳은 편
압록강 뗏목은 하루 낮에 1백리를 간다.북한땅 중강진 위쪽 건너편에 해당하는 중국 땅 임강에서 아침에 떠나면저녁나절 삼도구 맞은 편 조선족 강마을에 닿는다.거기서 숙식을 하는데 값은 광목천으로 치렀다.다음날 해관촌에 이르면 다음 뗏목꾼에 인계하고 걸어서 임강으로 돌아왔다.도보가 아니면 집안으로 가서 임강으로 오는 기차를 타기도 했다.봄부터 가을까지 뗏목을 타면 잡비를 떼고도 7백원쯤 벌어 겨울은 그냥 놀고 먹었다는 것이다.
뗏목꾼은 사자밥을 지고 다닌다고 했다.그 만큼 위험이 뒤따랐다.게다가 상놈 취급받기 일쑤였다.딸 과부 만들지 않으려면 물길 다니는 놈 사위 삼지 말라고 했다.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봄만 되면 또 뗏목에 올랐다.누군들 위태로운줄 몰라서 물길을 택했으랴.그래서 뗏목꾼들이 탄식하는 소리도 있다.「뗏목꾼 서럽네/고생이 막심하네/마소처럼 일하건만/상하고 죽으면 그만이네/강가에 버린 시체는 승냥이가 먹고/물속에 버리면/고기밥 신세지」
물길을 다니는 사람은 뗏목꾼 뿐이 아니다.뱃사람들도 압록강 물길에 목숨을 걸고 살았다.지금은 거의가 통통배로 바뀌었지만 옛날에는 힘들게 노를 젓고 재수가 좋아야 돛을달만한 바람을 만났다.뱃사람들에게도 물길이 고달프고 위험하기는 뗏목꾼과 마찬가지였다.요령성 관전현 석호구향 보산촌에서 찾아본 김택로(60)씨는 오랜 뱃사람이었다.
『삼십오륙년 전에만 해도 배를 탔디요.수풍발던(전)소에서 딥안(집안)까지 오갔시요.벼라별 딤을 다 싣고 다녔다 이겁네다.일이 고되니끼리 파에 된당(된장)띠ㄱ찍어 강냉이밥도 게눈 감추듯 했디요.물이야 똥물 먹고….배 위에서 배설하고 그 물을 먹는거디요.어떤 때 뱃머리에 뭐가 걸려 떠들어 보면 시테(시체)디….그걸 보면 내 신세로구나 하고 슬퍼디는 마음입데다』
○수풍까지 한달 걸려
그가 탄 배는 바닥 너비가 3m,길이가 12m의 일엽편주였다.그래도 3발7자의 돛을 달았다.쌀·석탄·목재 등 짐을 닥치는 대로 실었다.조짚이나 볏짚을 실으면 짐이 높아져 아차하면 뒤집히기 십상이었다.바람이 불면 돛을 올리고 그렇지 않으면 손에 못이 박히도록 노를 저었다.물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강가에 올라 밧줄로 끌어야했다.그래서 수풍에서 집안을 오가자면 한 달이 실히 걸렸다.
나는 압록강 뱃사람들의 소리 한 수를 또 들었다.「백두산 천지 울음의 천지/뱃놀이 구룡포에 정을 하건만/내 친구 옆에 서서 백마산 바라보니/의주 통곡동이 홀로 섰구나」라는 내용이다.여기 나오는 통곡동은 전설의 이름이고 본래 이름은 통군동이다.전설에 담긴 통곡동 사연은 애달프기까지 했다.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조선의 임금 선조가 의주 통군동으로 피란했는데 명나라 원군이 압록강가에 둔을 치고 꼼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임금은 어떤 신하가 권고하는 대로 독을 쓰고 통곡을 했다.그 울음소리에 이여송이 감동한 나머지 군사를 움직여 출병한 뒤 군사가 통과했대서 통군동이 되었다.이에 임금의 울음을 곁들여 통곡동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용강현 이도강촌에는 도망골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다.중국 동북지역을 강점한 일본인들의 산판이었는데,압록강 목재 운송의 기점이었다.그렇다고 도망골에서부터 뗏목을 맨 것이 아니라 벌채한 통나무를 우선 떠내려 보냈다.일본인들이 벌목인부들을 소나 말 처럼 혹사하기가 예사여서 도망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그래서 마을 이름이 도망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 도망골도 그저 한적한 산골마을에 불과했다.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명맥을 유지하던 압록강유역의 대대적인 임목벌채는 물론 뗏목이 서서히 사라졌기 때문이다.해방 이후에도 한동안은 압록강에 뗏목이 떴다.1953년 4월20일에는 중국과 북한이 심양에서 평등호리원칙에 따라 「압록강·두만강 유벌협정」을 맺었다.이어 1977년4월13일 평양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에서의 목재운송에 대한 협정서」를 교환했다.
○문혁이후왕래중단
이들 두 협정에는 벌목 인력의 월경작업과 뗏목의 규격,벌목 노동자의 상호지원 및 구호 등을 규정한 조항이 들어있다.그리고 자연재해와 특수사정에 따라서는 상대국 대안에 뗏목을 붙이고 등록만 마치면 상륙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다.실제 중국과 북한의 시와 현(군)급에서 서로 대표를 파견하여 벌목상의 문제점을 토의했다.그러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왕래가 중단되었다.그 여파는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압록강 수로가 본격적으로 개척된 것은 근대의 일이다.청나라 정부가 목세국을 설치한 1887년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그리고 나서 1902년에는 안동의 상신과 동변도관부가 합작으로 안동목식공사를 세우고 노동력을 고용하여 한해 1만여장의 뗏목을 띄웠다.또 1905년에는 일제가 중일목식공사를 설립했다.이는 압록강 연안 임산자원의 수탈을 본격화한 신호였다.
길림성 집안시 양수향에서 만난 손복상(70)노인은 젊어서 압록강 물길을 누빈 뗏목꾼이다.상류에서 떠내려 보낸 통나무를 떼로 묶어 놓으면 하류의 목적지까지 운송하는 것은 뗏목꾼의 임무다.그러니까 해방 이후 부터 뗏목을 탔다.
『임업국시절이 아닌 이화공사시절이니 끼리 스물두살에 뗏목에 올랐디요.압록강에서도 타고 송화강·흑룡강에서도 뗏목꾼으로 일했수다.서른댓살이 되어 그만 두었댔디요.압록강에서는 임강에서 타가지고 서리 양수향 해관촌에서 내렸습네다.우리 조상은 집안시에 사는 여사신이라는 사람인데,쉰살은 돼보이는 조선족이었디요.그 분은 일제 때부터 뗏목을 탔다고 기래요』
뗏목의 단위는 장이다.1장의 크기는 목재 1백50㎡ 안팎인데 너비 20m,길이 6m 정도가 보통이다.뗏목 1장에 2사람씩 오르고 5장을 1개조로 떠 내려간다.뗏목이 흐르기 시작하면 조장이 선창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화답으로 맞 받았다.그 뗏목소리는 대강 「파도를 헤쳐가자/물에 떠서 가자/노를 잡아라/잡았다네/힘을 내라/헤에야/잘도 간다/헤에야/갈구기 걸어라/헤에야…」라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수입은 그래도 낳은 편
압록강 뗏목은 하루 낮에 1백리를 간다.북한땅 중강진 위쪽 건너편에 해당하는 중국 땅 임강에서 아침에 떠나면저녁나절 삼도구 맞은 편 조선족 강마을에 닿는다.거기서 숙식을 하는데 값은 광목천으로 치렀다.다음날 해관촌에 이르면 다음 뗏목꾼에 인계하고 걸어서 임강으로 돌아왔다.도보가 아니면 집안으로 가서 임강으로 오는 기차를 타기도 했다.봄부터 가을까지 뗏목을 타면 잡비를 떼고도 7백원쯤 벌어 겨울은 그냥 놀고 먹었다는 것이다.
뗏목꾼은 사자밥을 지고 다닌다고 했다.그 만큼 위험이 뒤따랐다.게다가 상놈 취급받기 일쑤였다.딸 과부 만들지 않으려면 물길 다니는 놈 사위 삼지 말라고 했다.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봄만 되면 또 뗏목에 올랐다.누군들 위태로운줄 몰라서 물길을 택했으랴.그래서 뗏목꾼들이 탄식하는 소리도 있다.「뗏목꾼 서럽네/고생이 막심하네/마소처럼 일하건만/상하고 죽으면 그만이네/강가에 버린 시체는 승냥이가 먹고/물속에 버리면/고기밥 신세지」
물길을 다니는 사람은 뗏목꾼 뿐이 아니다.뱃사람들도 압록강 물길에 목숨을 걸고 살았다.지금은 거의가 통통배로 바뀌었지만 옛날에는 힘들게 노를 젓고 재수가 좋아야 돛을달만한 바람을 만났다.뱃사람들에게도 물길이 고달프고 위험하기는 뗏목꾼과 마찬가지였다.요령성 관전현 석호구향 보산촌에서 찾아본 김택로(60)씨는 오랜 뱃사람이었다.
『삼십오륙년 전에만 해도 배를 탔디요.수풍발던(전)소에서 딥안(집안)까지 오갔시요.벼라별 딤을 다 싣고 다녔다 이겁네다.일이 고되니끼리 파에 된당(된장)띠ㄱ찍어 강냉이밥도 게눈 감추듯 했디요.물이야 똥물 먹고….배 위에서 배설하고 그 물을 먹는거디요.어떤 때 뱃머리에 뭐가 걸려 떠들어 보면 시테(시체)디….그걸 보면 내 신세로구나 하고 슬퍼디는 마음입데다』
○수풍까지 한달 걸려
그가 탄 배는 바닥 너비가 3m,길이가 12m의 일엽편주였다.그래도 3발7자의 돛을 달았다.쌀·석탄·목재 등 짐을 닥치는 대로 실었다.조짚이나 볏짚을 실으면 짐이 높아져 아차하면 뒤집히기 십상이었다.바람이 불면 돛을 올리고 그렇지 않으면 손에 못이 박히도록 노를 저었다.물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강가에 올라 밧줄로 끌어야했다.그래서 수풍에서 집안을 오가자면 한 달이 실히 걸렸다.
나는 압록강 뱃사람들의 소리 한 수를 또 들었다.「백두산 천지 울음의 천지/뱃놀이 구룡포에 정을 하건만/내 친구 옆에 서서 백마산 바라보니/의주 통곡동이 홀로 섰구나」라는 내용이다.여기 나오는 통곡동은 전설의 이름이고 본래 이름은 통군동이다.전설에 담긴 통곡동 사연은 애달프기까지 했다.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조선의 임금 선조가 의주 통군동으로 피란했는데 명나라 원군이 압록강가에 둔을 치고 꼼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임금은 어떤 신하가 권고하는 대로 독을 쓰고 통곡을 했다.그 울음소리에 이여송이 감동한 나머지 군사를 움직여 출병한 뒤 군사가 통과했대서 통군동이 되었다.이에 임금의 울음을 곁들여 통곡동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1995-09-08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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