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론가 이효인의 스크린나들이] 나쁜 영화와 착한 소설

[영화 평론가 이효인의 스크린나들이] 나쁜 영화와 착한 소설

입력 2004-06-25 00:00
수정 2004-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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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느 문학상 수상집을 읽었다.예닐곱 편의 단편 소설이 실린 그 수상집뿐만 아니라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평화로워지고 약간은 퇴행의 감정에 빠지곤 한다.그건 나 스스로 문학 소년과 문학 청년이라는,희열에 찬 상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동시에 절망감에 휩싸였던 그 끔찍한 시절을 떠올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또는 그만큼 소설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소설들’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영화 '올드보이'
영화 '올드보이'
그 문학상 수상집에서 기억에 남는 소설은 역시 본상을 받은 소설이다.또 불륜의 관계를 줄줄이 엮은 후 결국에는 응징을 내리는 소설과 기러기 아빠가 된 한 남자와 그 아래층에 사는 간호사가 벌이는 건조한 불륜 끝의 비극적 최후에 관한 얘기 역시 기억에 남는다.본상을 받은 소설은 작가 특유의 단아하고 힘있는 문체 그리고 삶에 대한 단호한 입장이 잘 어우러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에 남은 것은 문체나 허구적 상황으로 극중 인물의 감정을 적당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감정의 끝을 보여주거나 혹은 느끼도록 하는 것이었다.반면 줄줄이 불륜과 기러기 아빠를 다룬 소설들은 세태에 대해 유려한 문체로 비판적 거리를 애써 유지하고 있지만,끝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그 끝이란 극중 인물의 감정의 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작가적 상상력의 끝을 의미한다.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취한 계몽적 태도가 장애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예술은 세상과 불화해야 한다고 믿는다.세상과의 불화야말로 이 세상을 바꾸는 힘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하지만 상상력의 부족이 빚어낸 어떤 가치의 고수가 곧 세상과의 불화는 아니라고 본다.그 소설들은 처음부터 착했고,끝까지 착했다.그 결과 그 소설들은 스스로 말하는 대신 들려주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얼마 전 ‘올드 보이’라는 한국 영화가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하지만 여러 정황을 감안하면,최고상을 받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볼 수 있다.경사로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수선을 피울 일도 아니다.영화제국(으로 자부하고 있는) 프랑스의 문화전략도 배제할 수 없거니와 상은 상일 뿐이기 때문이다.다만 국제적으로 또 상의 권위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자랑스러울 뿐이다.

각설하고 돌진한다면,그 ‘올드 보이’는 나쁜 영화다.이야기의 끝과 감정의 끝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결국에는 더 처절한 끝을 보여준다.황당한 설정이지만 그 약점들은 이미지를 통하여 진짜처럼 보인다.큰 반전과 작은 반전은 끝없이 이어지면서 마지막까지 관객을 즐겁게 하거나 혹은 괴롭힌다.

그 영화는 인간의 속성을 적당히 드러내는 대신 과장하여 끝까지 까발긴다.상상력의 승부다.관객의 동의 여부는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다.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세상과 불화한다.하지만 세상과 불화하면서도 상업적으로는 화해한다.그 결과 나쁜 영화의 자리에 기어이 내려앉으면서도 결국에는 시장 속의 예술로 우뚝 선 것이다.이런 점에서,예로 든 소설만을 놓고 말한다면,한국 소설은 좀더 나빠져야 한다.영화가 한 명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주목할 볼 필요가 있다.소설이라고 하여 꼭 한 명이 써야 된다는 법이 있는가?

반면 한국 영화는 조금은 착해질 필요가 있다.스펙터클에 대한 광신을 벗어던지고 보이는 이미지와 들려주는 이야기의 종합편에서 ‘보여주면서 말하는’ 영화를 생각할 때도 되었다.이제 상도 받았는데 말이다.

한국영상자료원장˝
2004-06-25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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