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평소에도 사림파를 비롯한 선비들을 증오하고 있었다.이극돈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는 글이라며 사림파들을 불충한 무리로 몰아 일으킨 것이 무오사화였으며,이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록 맨 첫머리에 기록한 사람이 바로 매계 조위였던 것이다.
무오년에 옥사가 일어나자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참소하기를 ‘매계가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기록한 것은 선왕 세조를 비난하기 위한 다른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하니,연산군은 크게 노하였다.그때 매계는 하정사(賀正使)로서 중국의 사신으로 들어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연산군은 강을 건너오는 즉시 참살하도록 명하였다.매계 일행이 요동에 도착하여 이 소식을 듣자 허둥지둥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매계의 서제(庶弟)로 신(伸)이라는 자가 있어 일찍이 그 지방에 점을 잘 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고 가서 길흉을 물었다.그 사람은 운수를 따지다가 다른 말은 없이 다만 시 한 수를 적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미지 확대
닫기이미지 확대 보기
“천층 물결 속에 몸이 뒤집혀 나오고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
신이 매계에게 말하기를 ‘처음 글귀는 화를 면하는 것 같기는 하나 아래 글귀는 해석하기 어렵다.’하고 서로 근심하여 소리 없이 울었다.
모두 압록강에 도착하여 강변을 바라보니 매계를 척살하기 위해서 관인들이 기다리는 형상이었다.일행이 실색하여 ‘금오랑(金吾郞)이 와서 형을 집행하기를 기다린다.’고 서로 부둥켜안고 목메어 울었고,매계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구나.’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마침내 강을 건너오자 정승 이극균이 다만 잡아다가 추문(推問)한다는 것을 알았다.일행이 기뻐하고 다행히 여겨서 이를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온다.’는 점쟁이의 시가 바로 맞은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아래 글귀는 해독되지 않았다.서울로 잡혀 왔으나 죽지는 않고 곤장을 맞고 순천으로 귀양 갔다가 병들어 죽어 고향인 금산으로 이장되었는데,그로부터 6년 뒤 갑자사화가 다시 일어나 연산군은 전일의 죄도 따로 기록하여 매계의 관을 쪼개어 시체를 참시하도록 명하였다.
시체를 바위 밑에 끌어내다 두고 사흘 동안 장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이에 모든 사람들이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라는 점괘가 맞음을 신통해하고 처음부터 끝까지의 매계의 운명을 점지하였다는 사실에 탄식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매계의 그런 일화는 훗날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척언집(言集)에 수록되어 있는데,척언이란 문자 그대로 ‘주워들은 이야기’란 뜻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모은 잡록집이었다.
매계의 이 일화는 특히 유생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김종직이 사후에 관속에서 꺼내어져 참시되었던 것처럼 사림파의 운명은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와 간신히 죽음을 면한다 하여도 끝내는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고 스스로 자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매계의 일화를 스승 한훤당을 통해 이미 전해들을 수 있었다.스승 한훤당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조광조와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매계가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이 뒤집혀 나온다 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더니 나도 천층 물결 속에서 헤쳐 나와 마침내 너를 만나게 되었구나.” “하면.”
조광조가 스승에게 물었다.
“‘바위 밑에서 사흘 밤 잠들기를 기다린다.’는 참언은 무슨 뜻입니까.” 이에 준엄한 스승은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부드럽게 말하였다.
“그를 내가 어찌 알겠느냐.어차피 점술이란 미신이 아니겠느냐.”
2004-05-04 47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