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嚴妃,남편 바람기 재우려 안간힘/“女色 멀리하도록 잘 보필하라” 鄭환덕에 경고/기다리다 못한 엄비 직간했다 고종의 미움 사/부부끼리 서로 의심… “왕비 폐출”흘리기까지/크게 놀란 엄비 가슴치며 하소연하다 쓰러져…
‘왕과 왕비’라고 부부싸움을 하지말란 법은 없다. 다만 원인이 다를 뿐이다. 가난이 유죄라고 사가에서는 돈때문에 부부싸움을 하지만 왕실에선 돈 걱정할리 없다. 걱정이 있다면 여자 문제다. 고종은 참조개탕을 즐기셨는데 하루는 조개탕을 들다가 이가 뿌러졌다. 누구의 책임인가 당연히 감선청(監膳廳)이 책임을 져야 했다.
상감께서 참조개탕(蛤子湯)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감선청에서는 조석으로 수라상에 조개탕을 올렸는데,하루는 상감이 조개탕을 드시다가 앞니 하나가 뿌러져 소반위에 떨어졌다. 덩그렁하며 소반에 이가 떨어지자 상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옆에 있던 순종은 크게 웃으시면서 측근을 불러 명하시기를 “감선당번은 무엇을 했는가. 당장 원도로 유배하라”고 명하셨다. 감선당번은 서인택(徐仁宅)과 이봉천(李鳳天) 두 사람이었다. 한 개 치아로 말미암아 두 사람이나 유배당하게 됐으니 과연 국법이 무섭기도 하다.
조개탕 사건이 일어나서 그랬던가. 우연치 않게 고종과 엄비사이에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1904년 고종의 나이가 50대 초반이었으니 아직 노쇠하였다고 보기 어려웠고 조개탕을 즐겨 그랬는지 양기에도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엄비는 상감의 옥체에 이상이 있을까 두려워했다.
순비(엄비)께서 내게 은근히 말씀하시기를 “상감께서는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나이(非老不少之年)신데 방사(房事=남녀의 동침)가 너무 빈번하셔 옥체를 상하실까 두렵소. 그대는 상감을 항상 가까히 모시고 있으면서 어찌 한번도 간하여 아뢰지 않았는가”라고 나무라셨다. 며칠 뒤 순비께서는 병풍 뒤에 숨어서 상감마마의 동정을 살피셨다고 들었다.
왕비도 여자인지라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정환덕을 불러서 질책하듯 원망하듯 황상을 잘 보필하라 했다. 엄비의 질책을 받고 정환덕은 기어이 상감께 성색(聲色)을 삼가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마침 상감이 매우 기분좋은 상태에서 정환덕에게 물었다.
상감께서 자못 기쁜 기색으로 물으시기를 “역색(易色)이란 말뜻을 아는가”하셨다. 이에 아뢰기를 역색이란 얼굴빛을 바꾼다는 뜻으로 여색을 좋아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에는 귀천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그러나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슬픔이 찾아오고(樂極哀生) 음탕함이 극에 달하면 재앙이 찾아오는 것(淫極災生)이 자연의 이치라 군자는 반드시 중도를 지킴으로써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였습니다”고 아뢰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엄비는 직접 고종에게 이렇게 간했다고 하는데 후환이 두려운 말이었다.
근래 국법이 해이하여 궁인들이 대궐 밖을 수시로 드나들고 있으니 혹시나 병에 걸려 들어오는 아이가 있지 않을까 두렵사오니 궁인을 상대하실 때는 반드시 정환덕에게 명하시어 그 사람의 몸에 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때 고종은 묵묵 부답하며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날 고종은 정환덕을 불러 독대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짐이 경과 함께 지내기를 밖으로는 군신지간(君臣之間)이었으나 안으로는 부자지간으로 정분을 나누어왔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지 못하겠는가. 묻겠는데 엄비에게 큰 비밀이 있다고 들었다. 그대는 아는가. 숨김없이 대답하라”고 하시었다.
깜짝 놀란 정환덕은 시침을 떼고 대답하기를 “청천벽력같은 말씀으로 소신은 전혀 아는 바 없습니다”라고 단언했다. “정녕 그러한가?” 고종께서 다시 다그쳐 물어 보았는데,그때 정환덕의 등에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도끼로 맞아죽는다고 해도 아뢸 말이 없습니다”고 잡아뗐다.
집에 돌아와 곰곰히 생각하니 동네사람의 부부싸움도 말리기 어려운데 하물며 국왕 내외에 있어서랴. 무슨 재주로 말릴 수 있겠는가 싶었다. 다음날 대궐에서 입궐하라는 명이 내려 인력거에 올라탔다. 대한문에 들어서니 안내자는 “오늘은 함녕전에서 부르신 것이 아니고 경선궁에서 부르신 것이니 그리로 갑시다”고 했다.
경선궁에는 엄비가 계셨다. 엄비가 물으시기를 “그대는 상감을 뵙고 무슨 말을 하였는가”고 하셨다. 사실대로 대답했다가는 대번에 야단맞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드디어 속여서 말씀 드리기를 “어제 밤 상감께서 소신에게 물으신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간사한 무리들이 혹은 일본에 붙고 혹은 러시아에 붙어 유언비어를 만들어 서로 이간질하고 마침내는 나라를 팔아 먹고 있으니 이 나라 운명의 길흉이 어떠한가를 물으셨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엄비께서는 손으로 가슴을 치며 말씀하시기를 “상감께서 내게 의심을 품으셔 장차 나를 폐출하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말씀이 있었는가”하셨다. 나는 시침을 떼고 “소신은 듣느니 처음입니다. 내외간 일을 상감이 소신에게 물으실리 있겠습니까.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고 대답했다.
엄비가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신하에게 하소연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엄비가 졸도하여 의식을 잃고 말았다.
“순비가 졸도하여 죽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어린 영왕은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하고 있으며 상궁나인들은 한편으로 엄비의 입에 기름을 넣어 드리고,다른 한편으로는 물을 목구멍에 넣어 드리느라 분주하다. 약으로는 사향환(麝香丸)을 갈아 드리고 있으나 삼키지 못하고 침을 흘릴 뿐이다. 어찌 하면 좋겠는가” 하시기에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니 길한 일이 모인다’(用死終生吉相聚)는 말을 인용하며 “염려 마시옵소서. 반시간만 지나면 깨어나실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벽시계를 보니 7시반이었다. 고종께서는 시계를 보더니 “과연 8시에는 깨어나시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더니 “너는 여기 있으라” 하시며 종종 걸음으로 대청으로 나가 내의(內醫)를 불러 화제(和劑)를 쓰라고 하시니 내의들은 강화자음전(降火磁陰煎)이 좋다느니 청심진정탕(淸心鎭靜湯)이 더 좋다느니 의견이 엇갈렸다. 그러기를 30분이 지나 괘종시계가 8시를 쳤는데 그때서야 내의의 화제가 나왔다. 사후 약방문 격이었다.<朴成壽 精文硏 교수·한국사>
‘왕과 왕비’라고 부부싸움을 하지말란 법은 없다. 다만 원인이 다를 뿐이다. 가난이 유죄라고 사가에서는 돈때문에 부부싸움을 하지만 왕실에선 돈 걱정할리 없다. 걱정이 있다면 여자 문제다. 고종은 참조개탕을 즐기셨는데 하루는 조개탕을 들다가 이가 뿌러졌다. 누구의 책임인가 당연히 감선청(監膳廳)이 책임을 져야 했다.
상감께서 참조개탕(蛤子湯)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감선청에서는 조석으로 수라상에 조개탕을 올렸는데,하루는 상감이 조개탕을 드시다가 앞니 하나가 뿌러져 소반위에 떨어졌다. 덩그렁하며 소반에 이가 떨어지자 상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옆에 있던 순종은 크게 웃으시면서 측근을 불러 명하시기를 “감선당번은 무엇을 했는가. 당장 원도로 유배하라”고 명하셨다. 감선당번은 서인택(徐仁宅)과 이봉천(李鳳天) 두 사람이었다. 한 개 치아로 말미암아 두 사람이나 유배당하게 됐으니 과연 국법이 무섭기도 하다.
조개탕 사건이 일어나서 그랬던가. 우연치 않게 고종과 엄비사이에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1904년 고종의 나이가 50대 초반이었으니 아직 노쇠하였다고 보기 어려웠고 조개탕을 즐겨 그랬는지 양기에도 별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엄비는 상감의 옥체에 이상이 있을까 두려워했다.
순비(엄비)께서 내게 은근히 말씀하시기를 “상감께서는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나이(非老不少之年)신데 방사(房事=남녀의 동침)가 너무 빈번하셔 옥체를 상하실까 두렵소. 그대는 상감을 항상 가까히 모시고 있으면서 어찌 한번도 간하여 아뢰지 않았는가”라고 나무라셨다. 며칠 뒤 순비께서는 병풍 뒤에 숨어서 상감마마의 동정을 살피셨다고 들었다.
왕비도 여자인지라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정환덕을 불러서 질책하듯 원망하듯 황상을 잘 보필하라 했다. 엄비의 질책을 받고 정환덕은 기어이 상감께 성색(聲色)을 삼가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마침 상감이 매우 기분좋은 상태에서 정환덕에게 물었다.
상감께서 자못 기쁜 기색으로 물으시기를 “역색(易色)이란 말뜻을 아는가”하셨다. 이에 아뢰기를 역색이란 얼굴빛을 바꾼다는 뜻으로 여색을 좋아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에는 귀천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 그러나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슬픔이 찾아오고(樂極哀生) 음탕함이 극에 달하면 재앙이 찾아오는 것(淫極災生)이 자연의 이치라 군자는 반드시 중도를 지킴으로써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였습니다”고 아뢰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엄비는 직접 고종에게 이렇게 간했다고 하는데 후환이 두려운 말이었다.
근래 국법이 해이하여 궁인들이 대궐 밖을 수시로 드나들고 있으니 혹시나 병에 걸려 들어오는 아이가 있지 않을까 두렵사오니 궁인을 상대하실 때는 반드시 정환덕에게 명하시어 그 사람의 몸에 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때 고종은 묵묵 부답하며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날 고종은 정환덕을 불러 독대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짐이 경과 함께 지내기를 밖으로는 군신지간(君臣之間)이었으나 안으로는 부자지간으로 정분을 나누어왔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지 못하겠는가. 묻겠는데 엄비에게 큰 비밀이 있다고 들었다. 그대는 아는가. 숨김없이 대답하라”고 하시었다.
깜짝 놀란 정환덕은 시침을 떼고 대답하기를 “청천벽력같은 말씀으로 소신은 전혀 아는 바 없습니다”라고 단언했다. “정녕 그러한가?” 고종께서 다시 다그쳐 물어 보았는데,그때 정환덕의 등에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면서도 “도끼로 맞아죽는다고 해도 아뢸 말이 없습니다”고 잡아뗐다.
집에 돌아와 곰곰히 생각하니 동네사람의 부부싸움도 말리기 어려운데 하물며 국왕 내외에 있어서랴. 무슨 재주로 말릴 수 있겠는가 싶었다. 다음날 대궐에서 입궐하라는 명이 내려 인력거에 올라탔다. 대한문에 들어서니 안내자는 “오늘은 함녕전에서 부르신 것이 아니고 경선궁에서 부르신 것이니 그리로 갑시다”고 했다.
경선궁에는 엄비가 계셨다. 엄비가 물으시기를 “그대는 상감을 뵙고 무슨 말을 하였는가”고 하셨다. 사실대로 대답했다가는 대번에 야단맞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드디어 속여서 말씀 드리기를 “어제 밤 상감께서 소신에게 물으신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간사한 무리들이 혹은 일본에 붙고 혹은 러시아에 붙어 유언비어를 만들어 서로 이간질하고 마침내는 나라를 팔아 먹고 있으니 이 나라 운명의 길흉이 어떠한가를 물으셨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엄비께서는 손으로 가슴을 치며 말씀하시기를 “상감께서 내게 의심을 품으셔 장차 나를 폐출하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말씀이 있었는가”하셨다. 나는 시침을 떼고 “소신은 듣느니 처음입니다. 내외간 일을 상감이 소신에게 물으실리 있겠습니까.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고 대답했다.
엄비가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신하에게 하소연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엄비가 졸도하여 의식을 잃고 말았다.
“순비가 졸도하여 죽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어린 영왕은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하고 있으며 상궁나인들은 한편으로 엄비의 입에 기름을 넣어 드리고,다른 한편으로는 물을 목구멍에 넣어 드리느라 분주하다. 약으로는 사향환(麝香丸)을 갈아 드리고 있으나 삼키지 못하고 침을 흘릴 뿐이다. 어찌 하면 좋겠는가” 하시기에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니 길한 일이 모인다’(用死終生吉相聚)는 말을 인용하며 “염려 마시옵소서. 반시간만 지나면 깨어나실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벽시계를 보니 7시반이었다. 고종께서는 시계를 보더니 “과연 8시에는 깨어나시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더니 “너는 여기 있으라” 하시며 종종 걸음으로 대청으로 나가 내의(內醫)를 불러 화제(和劑)를 쓰라고 하시니 내의들은 강화자음전(降火磁陰煎)이 좋다느니 청심진정탕(淸心鎭靜湯)이 더 좋다느니 의견이 엇갈렸다. 그러기를 30분이 지나 괘종시계가 8시를 쳤는데 그때서야 내의의 화제가 나왔다. 사후 약방문 격이었다.<朴成壽 精文硏 교수·한국사>
1998-08-12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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