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와 시민사회/이달곤(시론)

페스트와 시민사회/이달곤(시론)

이달곤 기자 기자
입력 1994-10-18 00:00
수정 1994-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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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도의 페스트는 카뮈가 그려낸 오랑의 페스트(LaPeste)보다는 심각하지 않은 모양이다.거기에도 여러 가지 뒷이야기들이 많으리라.카뮈의 소설에서 우리가 한가지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서운 페스트 병균과 싸우는 것은 정부도 아니고 대기업의 병원도 아니었다는 점이다.시외로의 탈출이 금지된 거대한 감옥과 같은 오랑에서 매일 수백명이 죽어가자,사람들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자포자기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헌신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숭고한 공동체 정신을 소생시키면서 싸우는 이가 바로 주인공인 의사 리외였다.페스트와 투쟁한 것은 다름아닌 리외가 만들어낸 시민공동체였다.카뮈는 소설의 마지막에,리외를 통하여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는다.…아마 언젠가는 인간에게 교훈과 불행을 주기 위해서… 어떤 행복한 도시로 또 몰려갈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이번 인도에서는 이러한 그의 경고가 어느 정도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거기에서도 공동체가 작동하였을까.

우리사회가 수많은 페스트균과 싸우고 있다면 과장임이 분명하다.그러나 카뮈가 페스트에서 준 교훈을 되새김해 볼 필요는 절실하다.지금 우리 사회에는 부패와 사기가 창궐하고 있다.민주화가 무질서와 방만으로 치닫고 있다.소득 1만달러대도 넘어서지 않은 이 곳에서 3만달러가 넘는 서구사회의 지하부분과 같은 조직화가 진행되고 있다.어린이고 어른이고 모두 세상사는 규범을 잃고 있다.서로를 극도로 불신하고 공동체라는 개념을 비웃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문제는 어떠한 기술적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해결하기 어렵고 모두 멸망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다만 인간성의 변화와 뉘우침이 행동으로 뒤따른다면 약간의 희망이 있을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예견하고 있다.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시민들이 집합적으로 어떻게 인간성의 개선을 도모하고 혼돈과 타산적인 삶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발전단계에서 이제 이러한 문제를 시민사회를 강화하면서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 합의가 형성되어 가는 느낌이다.문제는 어떻게 시민사회를 강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이러한 혼돈과 타산적 행태가 풍미하는 상황하에서는 어느 누구도 나서면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원로들과 정객들은 입으로는 모두 『도덕을 살리자』 『활력있는 공동체를 건설하자』고 큰 소리로 말한다.그러나 단순한 열변만으로는 건설되지 않는 것이 시민사회이다.개인의 열정을 묶어내고 지속시킬 수 있는 상세한 설계도와 연료가 필요하다.

이미 나선 이들이 더욱 뭉쳐지고 그들이 새로운 리더십을 발굴하여 결합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시민사회는 시장경제적인 유인과 권력적인 유인보다는 봉사에 대한 사회적 존경,자아의 실현이라는 제3의 유인에 의하여 움직인다.이러한 다양한 유인을 나름대로 제도화할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이대로 방치하고만 있어서는 시민사회의 활성화에 너무나 오랜시간이 걸릴 것이고 또 다른 페스트균에 의하여 상처받을 가능성도 크다.

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시민사회는 여러 부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무엇보다 정부가 시민사회에 힘을 불어넣는 것이 현대 정부의 주요한 임무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특히 정권의 핵심에서 정부와 사회와의 관계를 조절해 나가는 세력들이 시민사회의 건강성 회복과 활력없이는 한국의 21세기가 계속적으로 비틀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바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시민사회를 강화시킬 수 있는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기존의 각종 준공공기관과 단체관련 법규를 개정하여 그들의 기능을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시민단체로 전환시켜 나가야 한다.또 전후 독일이나 일본에서 장기적으로 펼친 정치교육이나 커뮤니티운동 등을 참고하여 시민운동이 전국적으로 짧은 시일안에 번져나가도록 불을 댕겨주어야 한다.일단 불이 붙여지면 지망자치제를 통하여 주민의 계속적인 관심을 유발시켜야 한다.

정부와 기업은 시민단체들의 활동에 기름을 부어넣을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고 스스로 솔선수범하여야 한다.정부는 기존의 준공공단체를 지원하는 데 사용하였던 재원을 독립적인 시민운동의 지원자금으로 전환하여야 하고 기업이 보다 적극적으로 자그마한 주민운동까지 손쉽게 지원할 수 있도록 기부금에 대한 각종 유인제도를 개발하여야 한다.언론과 정부는 우리사회에서 공동체를 위하여 모범을 보이고 있느 사회적 영웅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안고 있는 애로를 해소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야 한다.이러한 미시경영과 다자간의 협력체제 없이는 미동단계에 있는 시민사회가 줄기를 뻗기 어려울 것이다.이러한 전사회적인 노력없이 통일이후 당하게 될 페스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서울대교수·정책학>
1994-10-18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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