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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믿을 수 없어… 형제복지원 농성 멈출 수 없습니다”

“국가 믿을 수 없어… 형제복지원 농성 멈출 수 없습니다”

이하영 기자
입력 2018-06-25 23:43
업데이트 2018-06-2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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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날 가뒀나’ 이 의문을 푸는 진상 규명이 우리에겐 생존입니다. 그때 기어이 살아남았고, 지금도 살아남으려 애쓰는 우리는 ‘피해 생존자’입니다.”

지난 2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228일째 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자 모임의 대표 한종선(42)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씨가 오랜 농성으로 건강이 나빠져 광주광역시 한 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했다 퇴원한 지 이틀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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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의 부랑인 수용시설인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불법 감금·고문 등 인권유린 사건의 ‘피해생존자’ 한종선(43)씨가 지난 2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 설치된 농성장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의 부랑인 수용시설인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불법 감금·고문 등 인권유린 사건의 ‘피해생존자’ 한종선(43)씨가 지난 2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 설치된 농성장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유난히 더웠던 이날 비닐하우스 농성장에 앉아 있던 한씨는 “이런 날씨엔 복지원에서 관리자가 수용자를 뜨거운 햇볕 아래 고문하듯 세워 놓고 넘어지면 마구 때렸다”고 회상했다.

한씨는 군부 독재 시절 ‘부랑인 선도’ 명목으로 자행된 인권 유린의 피해자이자 어렵게 목숨을 이어 온 생존자다. 당시 정부는 30여개 수용시설을 지원해 거리의 부랑인을 해결하려고 했다.

부산 형제복지원에는 수천명이 불법 감금됐다. 한씨는 1984년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당시 어려운 형편에 아이들을 방치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밥 꼬박꼬박 주는 좋은 복지원’이라는 세간의 소문과 달리, 한씨와 누나는 형제복지원에 3년 동안 감금돼 강제 노역과 구타에 시달렸다.

12년간 최소 513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 사건은 1987년 세상에 알려졌고 시설은 폐쇄됐다. 부랑인 불법 감금의 근거가 됐던 내무부 훈령 제410조는 결국 폐지됐지만, 재판에 넘겨진 관계자들은 결국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국가 차원의 조사도 없었다. 그렇게 이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당시 부산 북구 주례동에 있던 형제복지원의 모습.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제공
당시 부산 북구 주례동에 있던 형제복지원의 모습.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제공


잊혔던 이 사건은 한씨가 2012년 국회 앞 농성을 시작하며 환기됐다. 한씨가 농성을 시작하게 된 건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면서부터다. 한씨는 “공사판에서 몸을 다쳐 일할 수 없게 돼 2007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을 하러 구청에 갔다가 아버지와 누나의 생존을 알게 됐다”고 했다.

20년 만에 가족을 만난다는 기쁨에 곧장 달려간 주소에는 한 정신병원이 있었다. 고통스러운 형제복지원의 기억이 한씨 아버지와 누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이었다.

한씨는 “그때까진 나보다 더 똑똑한 지식인들이 이 사건을 밝혀주겠지 믿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더라”면서 “더는 기다려선 안 되고 직접 나서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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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1987’ 형제복지원 사건 재조사 촉구
‘또 하나의 1987’ 형제복지원 사건 재조사 촉구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17일 열린 형제복지원 인권유린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에 참가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 생존자들이 정부의 책임있는 조사를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한씨가 나선 이후 100여명의 피해자들이 연락해 왔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생겼고, 국회에는 ‘내무부 훈령 등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 규명 법률안’이 발의됐다. 최근 검찰 과거사위에선 외압 의혹이 제기됐던 관련 사건을 재조사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도 왜 아직 농성을 하느냐는 질문에 한씨는 “우리는 국가 폭력의 피해자여서 국가 기관을 잘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겉으로 보기엔 변화가 생긴 것 같지만, 실제로 크게 바뀐 것은 없다”면서 “특별법은 국회에 걸려 있고, 검찰도 이제야 우리를 불러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특별법은 19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여전히 국회에 머물러 있고, 검찰 조사는 1차적으론 울산에 파견된 형제복지원생 사망 사건을 덮은 검찰의 외압 사건에 대한 재조사다.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 차려진 형제복지원 피해자 농성장 옆 세워진 형제복지원 사건 안내판.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 차려진 형제복지원 피해자 농성장 옆 세워진 형제복지원 사건 안내판.


한씨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 더 많은 피해 생존자가 드러나 진상 규명이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의 특성상 여전히 국가 권력이 두려워 나서지 못하는 피해 생존자가 많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비교적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에 돌입하면 당시 전국에 비슷하게 운영됐던 선감학원 등 36개 시설에 대한 조사로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씨를 비롯해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피해자’ 대신 ‘피해 생존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와 피해를 딛고 앞으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미가 모두 포함된다. 한씨는 “‘국가는 왜 날 가뒀나’라는 질문에 국가가 제대로 답해야 비로소 피해 생존자들은 진실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씨는 고통스러운 삶에 주저앉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고 싸우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재단법인 진실의힘 ‘제8회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식은 유엔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을 맞아 26일 서울 중구 문학의집에서 열린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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