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도 “착한 우파” “나쁜 좌파”

아이들도 “착한 우파” “나쁜 좌파”

입력 2008-12-23 00:00
수정 2008-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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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1.

 지난 21일 기자가 사는 서울 어느 동네의 한 중학교 교정.을씨년한 교정 한쪽,담벼락에 해맑은 얼굴의 남녀 학생 사진들이 붙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오른쪽 끝 슈퍼맨 복장을 한 남자 중학생의 포스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했다.그를 비롯,8명의 전교 학생회 회장·부회장 선거 출마자 8명의 면면과 핵심 구호가 죽 펼쳐졌다.

 구호도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재기가 반가웠다.기자가 중학교 다닐 적 많이 들었던 ‘선후배가 하나 되는 학교를 만들겠다.’는 구호가 빠지지 않은 것을 보면서 세월이 흘러도 학교는 학교란 생각에 풋 웃음이 나왔다.거기에선 갈라선 학교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장면 2.

 23일 낮 서울 중구 정동 배재학술지원센터 3층에 약 20명의 중학생들이 문화운동가 선배들과 워크숍을 갖고 있었다.이들은 이날 전국에서 중학교 1~2학년생들을 대상으로 치러진 연합 학력평가 시험(일제고사)을 거부하는 학생들이었다.물론 시험을 치르고 나중에 합류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등교를 거부한 채 오전에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던 아이들이었다.아이들은 워크숍을 마친 뒤 오후 4시 보신각 앞에서 열리는 집회와 오후 7시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개최되는 촛불시위에 참여할 계획이라고 했다.

 시쳇말로 속단하면 ‘또 갈라선 학교’ 의 한 축이 될 아이들이었다.

 

 장면 2의 워크숍은 같은 시간 덕수궁 미술관 체험학습에 참여한 무리와 패를 나눠 진행된 것.이 아이들이 장면 1에 등장하는 포스터 속 아이들만큼 해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30분 정도 서로 친해지기 위해 간단한 게임을 한 뒤 ‘일제고사는 □□□’ 놀이를 시작했다.아이들의 답은 ‘블랙홀’ ‘쓰레기장’ ‘핵무기’ ‘가면’ ‘두더쥐’ 등 갖가지였다.두더쥐란 답을 내놓은 아이는 “때려줘야 하기 때문”이란 또래다운 답을 내놓았고 아이들은 일제히 웃음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아이들은 직후 상황극 준비에 들어갔다.처음에는 5명씩 네 팀으로 나눠 일제고사를 꼭 봐야 한다는 일부의 논리에 반박하는 논리를 짜내자는 취지로 시작됐지만 한 팀에서 상황극을 준비하는 듯하자 모두 따라 했다.아이들은 때로는 장난스럽게 때로는 진지하게 상황을 짜맞췄고 역할을 분담했다.

 아빠가 돼서 “사랑하는 아들아 학원 좀 열심히 다녀라”고 아들을 타일러(?) 보기도 했고 엄마가 돼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보기도 했다.선생님이 돼서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말도 안 들어”라고 비아냥대 보기도 했다.징계 진술서를 받아내야 하는 선생님 역할도 해보고 심드렁한 표정에 “아이 씨”만 연발하는 문제학생 역할도 해보았다.

 성적을 잘 받아 저만 잘난 척 뽐내는 학생도 연기해 보았고 학부모를 너무 친절히 대하는 학원 선생님 역할도 해보았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쓸모 없는 시험”이라고 일제고사를 단도질했다.괜한 경쟁심을 학교 현장에 유발하고 그렇지 않아도 많은 시험에 스트레스를 잔뜩 부풀려 놓았다고 입이 튀어나와 있었다.

 한 문화활동가는 2시간여 워크숍을 정리하면서 “삶의 가치를 성적으로만 평가하는 건 위험하다.등교거부도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 중의 하나다.권리를 지키는 것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 투쟁하는 길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고 난 뒤 일인당 두개의 깃발에 구호를 적어넣었다.한 아이는 “이번에 진술서를 쓰면 세 번째”라면서 “내일 학교 가는 게 걱정된다.”고 말했다.그리고 이내 또래들에 뒤섞여 매직펜을 붙잡고 안경 아래 색종이에 시선을 모았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하니 교과서 수정이나 사학 민주화 같은 민감한 문제들로 빚어진 갈등 아래 교육이 놓일 순 없는 노릇.정권도 조심해야 하고 언론도 짐짓 신중해야 하며 하물며 사학이나 교원단체도 한 발짝씩 물러나는 지혜가 요구된다.

 두 장면에 등장한 아이들의 해맑음을 비교할 순 없는 노릇이다.가장 중요한 교육주체인 학생들의 발언권은 짐짓 ‘애들이 뭘 알겠어’ 이 한마디에 파묻히곤 한다.아이들이 처음 게임 도중 줄을 긋고 패를 나눠야 했을 때 “착한 우파” “나쁜 좌파”라고 했던 우스갯소리가 우스갯소리로만 그치지 않을 터.

 씁쓸한 마음으로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오는데 시청앞 광장 스케이트장을 가득 메운 아이들의 북적거림이 더욱 심란함을 부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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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울신문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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