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9년 전 지운 아기, 아직도 죄책감 시달립니다

‘미안해’ 9년 전 지운 아기, 아직도 죄책감 시달립니다

김정화 기자
입력 2020-10-18 18:03
수정 2020-12-0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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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낙태했다” 모두가 알지만 하지 않은 이야기
<1> 수술대에 누웠다,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났다

67년간 여성의 몸을 옭아맨 형법상 낙태죄의 개정 시한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정부가 임신중절(낙태) 허용 주수를 놓고 씨름하며 ‘불법’ 낙인은 거두지 않는 사이 여성들은 여전히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받는다. 서울신문은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이 사회적 지탄을 두려워하며 가슴에 묻었던 이야기를 연속 인터뷰로 공개한다. 직업도, 나이도, 상황도 다르지만 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낙태는 죄가 아니라 나를 지키는 선택이자 책임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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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년 전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한 이현지(가명)씨가 지난 17일 서울시내 한 카페에서 서울신문과 만나 낙태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 9년 전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한 이현지(가명)씨가 지난 17일 서울시내 한 카페에서 서울신문과 만나 낙태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직장인 이현지(37·가명)씨의 휴대전화 달력은 매년 2월 11일 알람을 울어댄다. ‘미안해 아가야’ 여섯 글자가 무지근한 그날의 고통을 상기시킨다. 9년 전 이씨는 임신중절 수술을 했다.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씨는 임신 테스트기에서 선명한 두 줄을 확인하는 순간 “지구 종말이 온 것 같았다”고 말했다. “원래 피임을 철저히 하는데 딱 하루 제대로 못 했고, 너무 순식간이라 임신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했다. 임신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몸살과 함께 찾아왔다. 몸이 건강한 편이었는데도 그날 이후 머리가 어지럽고 속은 메슥거리고, 온몸이 아파 죽을 것만 같았다. 처음엔 야근이 잦아 그런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게 임신 초기 증세였다.

임신 사실만으로 이미 공황 상태였는데 수술할 수 있는 병원을 찾는 건 더 힘들었다. 이씨는 “동네 산부인과를 일일이 돌면서 물어봤는데, 내가 불법을 저지르는 것 같아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겨우 찾은 병원에서도 의사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수술 과정과 후유증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대신 “어떻게 5주차까지 임신 사실을 모를 수 있느냐”며 이씨를 혼냈다. “젊은 사람이 몸을 함부로 굴렸다”는 말도 따라나왔다.

수술의 충격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의사는 전신마취 대신 부분마취를 택했다. 이씨는 수술기구가 몸속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모습과 소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수술이 끝나자 의사는 몸에서 꺼낸 덩어리까지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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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한 이현지(가명)씨는 당시 고통과 아픔을 잊지 않으려고 ‘미안해 아가야’라는 이름의 휴대전화 알람이 매년 울리도록 설정해 뒀다.
9년 전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한 이현지(가명)씨는 당시 고통과 아픔을 잊지 않으려고 ‘미안해 아가야’라는 이름의 휴대전화 알람이 매년 울리도록 설정해 뒀다.
이씨가 휴대전화 알람으로 매년 떠난 생명을 기억하는 것은 당시의 죄책감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씨를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도 놀랐겠지만 솔직히 나도 충격이 커. 나도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어.”

혼자 울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씨는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렸다. 그의 어머니는 이씨의 동생을 가졌을 때 낙태를 고민했다. 터울이 너무 크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집안인 탓에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이씨는 “원래 엄마랑 각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돌아가실 때도 큰 감정의 동요가 없었는데 수술하고 나니 저절로 떠오르더라”면서 “엄마가 살아 있었으면 내 편이 돼 줬을까 하는 생각에 정말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남자친구나 당시 룸메이트 외에 이씨가 자신의 낙태 경험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그동안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이 무서워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는데, 정부가 내놓은 입법예고안을 보고 너무 화가 났다”고 했다. 정부는 지난 7일 현행 낙태죄를 유지, 임신 초기인 14주까지만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내용의 입법예고안을 내놨다.

이씨는 “임신중절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거다. 그래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다”며 “통증도 부채감도 여성만의 몫인데, 법으로까지 처벌하는 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경제적, 사회적으로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는 상황에서 아예 낳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도 의미 있는 선택”이라며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는 것처럼 낙태도 불법이 아니라 책임감 있는 행동으로 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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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은 낙태죄 개정을 앞두고 임신중절을 직접 경험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연속 인터뷰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법적 처벌과 윤리적인 비난 사이에서 남몰래 꽁꽁 숨겨둔 이야기를 clean@seoul.co.kr 으로 들려주세요.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한 여성의 선택은 죄가 아니라는 여러분의 목소리를 끝까지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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