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비극과 고단한 현실 그속에 녹아든 ‘삶의 비애’

분단의 비극과 고단한 현실 그속에 녹아든 ‘삶의 비애’

입력 2005-04-01 00:00
수정 2005-04-01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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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가치가 표백돼 버린 상실의 시대. 아직도 그 이념의 문제를 화두로 붙들고 있는 작가가 우리 곁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소설집 ‘모란시장 여자’(창비 펴냄)를 내놓은 중견작가 정도상(45)은 그 몇 안 되는 글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상으로만 침잠해 들어가는 소설 쓰기의 유행에서 저만치 비켜선 작가는, 목을 길게 빼고 상처 입은 현실 구석구석에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

‘개잡는 여자’의 눈에 비친 끔찍한 일상

원색적인 어감이 적나라한 현실 발언 같아서 애써 톤을 낮춘 것일까. 첫 작품이자 표제작인 단편 ‘개잡는 여자’는 한결 순화된 언어로 바뀌었다.

주인공은 성남 모란시장에서 개를 잡아 팔아 생계를 잇는 여인 미자. 날마다 수십 마리의 개를 죽이며 그악스럽게 사는 여자의 하루는 신산하기 짝이 없다. 어린 아들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고, 외도 끝에 딴 여자에게서 아이까지 얻은 남편은 이혼을 요구해 오고, 아버지는 허구한 날 누구인지도 모를 젊은 여자의 사진만 들여다본다.

비켜갈 수 없는 고단한 현실과 마무리되지 못한 분단비극을 균형감 있게 섞었다는 게 이번 소설집의 특징이다.‘개잡는 여자’에서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북에 두고 온 첫 부인을 못 잊어 기억을 묶어 놓고 산다면,‘그토록 긴 세월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어머니는 죽었다 깨어나기를 세 번이나 거듭하더니 아들에게 북에 살아 있는 아버지의 존재를 알리고서야 비로소 죽음을 맞는다.

이 두 작품에서는 분단과 이념의 잔영이 걸쭉한 필치, 때론 희극적 서사를 빌려 소설에 투사됐다.

장기수 아들과 어머니의 사랑

이와는 달리 정색하고 읽게 되는 작품이 단편 ‘부용산’이다. 간첩 혐의로 감옥에 갇힌 장기수 아들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편지가 기둥 서사. 그러나 모자의 극적인 상봉, 곧 이은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는 주인공 아들의 시선을 통해 이 작품의 주제의식은 어느 결에 ‘불멸의 사랑’ 쪽으로 부쩍 몸집을 불린다.

수렁에 빠진 자본주의 사회 고발

수렁에 빠진 자본주의 사회를 액면 그대로 고발하는 작품도 있다. 아들의 병역비리를 무마시키려 검사에게 성상납을 하는 대기업 이사(‘오늘도 무사히’),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험설계사로 나섰다가 카드빚에 몰려 죽음을 결심하는 여자(‘달빛의 끝’)는 낭떠러지로 떨어진 자본사회를 통찰케 한다.

작가는 지난해 연작소설 ‘실상사’를 펴내기 이전, 그러니까 1990년대 말부터 2000년 초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이번 책에 묶었다. 스러진 이념의 가치를 “낡은 집”이라고 표현했듯이 작가는 새 소설을 통해 불멸은 곧 재앙이며, 시대 흐름이든 이념이든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함을 에둘러 주장한다.

소설가 방현석은 “불멸은 재앙임을, 거름이 썩어 가며 새로운 생명을 길러내듯 우리 삶도 부패하고 소멸하면서 비로소 새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고 평했다.

작가는 1987년 광주항쟁소설집 ‘일어서는 땅’에 단편소설 ‘십오방 이야기’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2005-04-01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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