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하버드 대학 교정에서 알게된 최숙렬씨가 한국에 온 지 한달이 다 되어간다.하버드 대학 학생회가 주최한 강연회 자리에서 한차례 만났을 뿐인데도 그녀의 쓸쓸한 모국방문이 내 책임인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왜냐하면 그녀가 미국 땅에서 조용하지만,알차게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어떻게 알렸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정신대 문제,징용 문제와 분단의 역사를 쓴 그녀의 자전적 소설 ‘안녕이라고 말할 수 없는 세월’(Year of Impossible Goodbye,Houghton Mifflin Co.,1991)은 이미 일본어,프랑스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고 미국의 중·고등학교,대학에서 정식 교재로 채택된 지 오래다.
그녀는 미국의 중·고등학교,대학교,공공도서관을 다니면서 한국과 한국인,한국 문화를 감동적인 언어로 알리고 있다.자그만 체구의 그녀가 벌이는 여정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항상 빚진 기분이 든다.
빚쟁이 기분은 다른 해외동포들에게도 마찬가지다.중앙아시아 한인 연구를 체계화하는데 송희현 선생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송희현 선생은 1995년 중앙아시아 한인 연구를 도와주기 위해 하바로프스크에서 서울로,다시 서울에서 타슈켄트와 알마티의 집단농장을 도는 무리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 속 강행군이 원인이 되었는지 연구가 끝난 그 해(1995년) 11월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가끔은 화가 신 니콜라이의 창고 화랑과 그가 손수 만들어 주었던 기름밥(우리의 볶음밥)이 생각나기도 한다.아홉 살 때 겪었던 강제 이주의 기억은 신 니콜라이 화백에게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비명소리로 남았다.그는 레퀴엠이라는 제목으로 어린 영혼이 살아남아 즐거운 결혼식을 올리는 상상화를 밤마다 그렸다.지하 화실을 가득 메운 레퀴엠,쌀가마 위에 환하게 웃고 있는 신랑 신부의 그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rmf로벌 시대가 되면서 해외 동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해외 동포의 네트워크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다.도쿄에서 열린 아시안 디아스포라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베이징 대학 이안산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중국은 해외 유학생들에 대한 것은 물론,각 대륙별로 흩어져 있는 화교 연구를 치밀하게 쌓아두고 있다고 한다.
해외동포 연구는 대중 매체를 통해 중국인들의 안방까지 파고들고 있었다.홍콩의 NGO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아킹은 텔레비전에서 본 남극의 화교 이야기,아프리카의 화교 이야기를 신이 나서 들려주었다.
뉴욕 맨해튼의 토요일은 소수 민족의 국기와 풍물로 다채롭다.소수 민족들에게 할애한 문화의 날에 소수 민족들은 모국의 국기 아래 한데 모여 자신들의 문화를 뽐낸다.지리적 국경을 넘었다고 마음의 국경까지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해외동포의 모국애가 21세기의 새로운 자산이라는 것을 알고 다른 나라들은 일찍이 해외동포 연구와 해외동포 네트워크 만들기를 중요한 국책 사업으로 정립하였다.분단된 현실은 모국애를 마음놓고 담을 수 없는 그릇이다.그러기에 해외동포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들은 식민지 시기 이전으로 퇴행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한인들은 카레이스키(고려인),재중한인은 조선족,재일교포들은 ‘조선적’,‘해외동포’,‘재일이세(자이니치)’라고 서로 이름을 달리 부르고 있다.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모국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다.모국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담을 그릇을 마련해 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해외 동포의 모국애를 담아 낼 때 우리는 21세기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옥 대구가톨릭대 사회학
왜냐하면 그녀가 미국 땅에서 조용하지만,알차게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어떻게 알렸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정신대 문제,징용 문제와 분단의 역사를 쓴 그녀의 자전적 소설 ‘안녕이라고 말할 수 없는 세월’(Year of Impossible Goodbye,Houghton Mifflin Co.,1991)은 이미 일본어,프랑스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고 미국의 중·고등학교,대학에서 정식 교재로 채택된 지 오래다.
그녀는 미국의 중·고등학교,대학교,공공도서관을 다니면서 한국과 한국인,한국 문화를 감동적인 언어로 알리고 있다.자그만 체구의 그녀가 벌이는 여정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항상 빚진 기분이 든다.
빚쟁이 기분은 다른 해외동포들에게도 마찬가지다.중앙아시아 한인 연구를 체계화하는데 송희현 선생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송희현 선생은 1995년 중앙아시아 한인 연구를 도와주기 위해 하바로프스크에서 서울로,다시 서울에서 타슈켄트와 알마티의 집단농장을 도는 무리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 속 강행군이 원인이 되었는지 연구가 끝난 그 해(1995년) 11월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가끔은 화가 신 니콜라이의 창고 화랑과 그가 손수 만들어 주었던 기름밥(우리의 볶음밥)이 생각나기도 한다.아홉 살 때 겪었던 강제 이주의 기억은 신 니콜라이 화백에게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비명소리로 남았다.그는 레퀴엠이라는 제목으로 어린 영혼이 살아남아 즐거운 결혼식을 올리는 상상화를 밤마다 그렸다.지하 화실을 가득 메운 레퀴엠,쌀가마 위에 환하게 웃고 있는 신랑 신부의 그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rmf로벌 시대가 되면서 해외 동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해외 동포의 네트워크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다.도쿄에서 열린 아시안 디아스포라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베이징 대학 이안산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중국은 해외 유학생들에 대한 것은 물론,각 대륙별로 흩어져 있는 화교 연구를 치밀하게 쌓아두고 있다고 한다.
해외동포 연구는 대중 매체를 통해 중국인들의 안방까지 파고들고 있었다.홍콩의 NGO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아킹은 텔레비전에서 본 남극의 화교 이야기,아프리카의 화교 이야기를 신이 나서 들려주었다.
뉴욕 맨해튼의 토요일은 소수 민족의 국기와 풍물로 다채롭다.소수 민족들에게 할애한 문화의 날에 소수 민족들은 모국의 국기 아래 한데 모여 자신들의 문화를 뽐낸다.지리적 국경을 넘었다고 마음의 국경까지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해외동포의 모국애가 21세기의 새로운 자산이라는 것을 알고 다른 나라들은 일찍이 해외동포 연구와 해외동포 네트워크 만들기를 중요한 국책 사업으로 정립하였다.분단된 현실은 모국애를 마음놓고 담을 수 없는 그릇이다.그러기에 해외동포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들은 식민지 시기 이전으로 퇴행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한인들은 카레이스키(고려인),재중한인은 조선족,재일교포들은 ‘조선적’,‘해외동포’,‘재일이세(자이니치)’라고 서로 이름을 달리 부르고 있다.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모국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다.모국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담을 그릇을 마련해 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해외 동포의 모국애를 담아 낼 때 우리는 21세기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옥 대구가톨릭대 사회학
2004-09-17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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