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기자의 취재 중 생긴 일] ‘성평등’ 현수막이 정말 선거법 위반인가요

[사건기자의 취재 중 생긴 일] ‘성평등’ 현수막이 정말 선거법 위반인가요

오세진 기자
입력 2021-03-28 20:18
수정 2021-03-29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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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진 사회부 기자
오세진 사회부 기자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를 지원하는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공동행동’은 다음달 7일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지난 9일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에 연락했다. ‘보궐선거 왜 하죠? 우리는 성평등한 서울을 원한다’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 게시 행위가 공직선거법 위반에 해당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선관위는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답변했다. 이에 공동행동은 현수막 문구를 ‘우리는 성평등에 투표한다’, ‘우리는 페미니즘에 투표한다’로 대신하겠다고 밝혔지만 선관위로부터 같은 답변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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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공동행동’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이들은 ‘성평등’이라는 문구를 기재한 현수막이 공직선거법 위반이라는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을 비판했다.  연합뉴스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공동행동’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이들은 ‘성평등’이라는 문구를 기재한 현수막이 공직선거법 위반이라는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을 비판했다.
연합뉴스
선관위는 선거법 제90조를 근거로 제시했다. 이 조항은 누구든지 선거일 전 180일(보궐선거 등에서는 그 선거의 실시 사유가 확정된 때)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해 현수막을 포함한 시설물을 설치·진열·게시·배부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정당 명칭이나 후보자의 성명, 이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명시한 경우도 금지 대상이다.

그런데 최근 이 조항을 위반해 기소된 사건들과 비교하면 공동행동이 사용하려고 한 문구들이 선관위의 판단처럼 정당 명칭 또는 후보자의 성명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에 해당하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지난해 총선 때 대구 북구 의원으로 출마한 후보자의 자원봉사자로 일한 A씨는 선거일 전에 후보자의 선거공보 및 선거벽보에 기재된 ‘확실한 지역발전’이라는 문구를 차용한 현수막과 후보자의 공약을 뜻하는 ‘복합문화스포츠센터 건립’이라는 문구가 기재된 현수막을 설치한 혐의로 기소돼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았다.

B씨는 지난해 3월 부산 수영구 한 정당 사무실 앞에서 ‘거대야당 해체하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했다. 재판부는 일반 유권자들 입장에서 당시 B씨가 말한 ‘거대야당’이 어떤 정당을 의미하는지 용이하게 유추할 수 있고, ‘해체하라’는 문구도 해당 정당 및 그 후보자를 지지하지 말라는 내용임을 유추할 수 있는 점 등을 종합했을 때 B씨의 행위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된다며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이와 같이 피고인들이 특정 후보자의 선거공보물에 기재된 문구를 차용하거나 후보자의 공약을 가리키는 글자를 적은 현수막을 게시하는 행위, 특정 정당을 가리키며 반대 또는 지지 의사를 표현하는 행위는 ‘정당 명칭·후보자의 성명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명시한 경우’로 간주됐다. 공동행동이 현수막에 기재하려고 했던 문구들이 과연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지는 의문이다.

또 2011년 6월 24일 선고된 대법원 판례는 “단체가 선거 이전부터 지지·반대하여 온 특정 정책이 각 정당 및 선거에 출마하고자 하는 입후보 예정자들의 공약으로 채택되거나 정당·후보자 간 쟁점으로 부각된 정치적·사회적 현안을 말하는 이른바 선거 쟁점에 해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사정만으로 그 특정 정책에 대한 단체의 지지·반대 활동이 전부 선거법에 의한 규제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하고 있다.

선관위가 공동행동을 구성하는 여성단체들이 오래전부터 ‘성평등’ 실현을 위한 활동을 전개한 점 등 앞서 언급한 여러 사정을 고려했는지는 의문이다. 혹시 현수막 문구에 ‘투표’, ‘선거’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사정만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한 행위로 판단한 게 아닐까. 선관위는 조만간 공식 입장을 정리해 발표하겠다고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26일 “선거법 제90조·제93조 등이 선거운동 및 유권자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여 국민의 법 감정과 눈높이에 부합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규제 위주라는 지적에 깊이 공감한다”며 “위원회는 선거운동과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확대하고 보장하는 내용으로 선거법 개정 의견을 국회에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제출한 바 있다. 이번 재보궐선거일 이후에도 각계 의견을 수렴하여 개정 의견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선거 기간에 성평등의 실현을 요구할 수 있는 자유마저 보장되지 않는 선거법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귀를 닫은 국회가 해결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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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sjin@seoul.co.kr
2021-03-29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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