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숙 칼럼] 남산을 걸으며

[임영숙 칼럼] 남산을 걸으며

임영숙 기자 기자
입력 2002-09-19 00:00
수정 2002-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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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일산을 잇는 자유로를 달리던 아침 출근길의 자동차가 갑자기 멈춰섰다고 합니다.길 옆 한강 둑 풀숲에서 나타났는지 아기 뜸부기들이 길을 건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자기네들끼리 마음껏 유유자적하며,해찰할 것 다 하면서,천천히 도로를 걷는 그 아기 새들을 발견한 한 운전자가 급제동을 걸고 그들이 놀라지 않도록 시동까지 끈 다음 뒤에 따라 오던 차들에게 신호를 보내 멈춰 서게 했다고 합니다.

1분이 아쉬운 아침 출근 길에 자유로의 자동차들은 뜸부기들이 안전하게 길을 건너도록 기다렸다가 기분 좋게 다시 달렸다고 합니다.

자유로의 그 운전자들처럼 즐거운 멈춤을 저는 남산 산책길에서 자주 합니다.지난 여름 비 오는 주말,남산 야외식물원을 걷다가 앞 사람이 숨을 죽인채 서 있는 것을 보고 저도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바로 1∼2m 앞에 장끼 한 마리가,자신의 영역인 숲속을 벗어나 사람의 길을 따라 유유히 산책하고 있었습니다.또 어느 날인가는 산책길 옆 잔디밭에 앉아 있는 토끼를 만났습니다.온 몸이 하얀 털로 덮였으나 눈주변만 판다처럼 까만 털이 돋은 아주 잘 생긴 녀석이었습니다.서울시의 남산공원 소개 자료는,남산에 사는 짐승이다람쥐·쥐 등 2과 2종뿐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의외의 만남이었습니다.

‘동심의 화가’ 장욱진 선생은 “고궁이 가장 고궁다울 때는 비오는 날”이라고 했습니다.20여년 전 혜화동 자택을 찾았을 때였습니다.마당 한 쪽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웠는데 그 정자의 난간이 부자연스럽게 높았습니다.술에 취해 정자에 올랐다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한 가족들의 배려였습니다.그날도 술에 취한 채 기자를 만난 장 화백은 비 오는 날 고궁을 찾는다고 말했습니다.남산도 비 오는 날이 가장 산다워서 그렇게 산책하는 장끼와 토끼를 만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그러나 지난 여름의 집중호우와 태풍은 그마저도 지나친 호사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했습니다.

남산 산책길에서는 아름다운 자연은 물론 아름다운 사람들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강아지와 달리기를 하며 까르륵 까르륵 웃는 아이들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다정한 연인들,그리고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젊은 부부를 보며저는 그들의 희망과 꿈을 짐작해 봅니다.건강을 위해 맨발로 공원을 열심히 걷는 뚱뚱한 아줌마와 아저씨도 정겹습니다.야생화 공원 원두막에서 어린 손자에게 등을 긁게 하고 부채로 더위를 쫓으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의 모습은 행복 그 자체입니다.

무엇보다 남산이 아름다운 것은 시각 장애인을 위한 산책길과 식물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장욱진 선생의 혜화동 집 정자처럼 추락방지용 난간을 설치하고 점자를 병행 표기한 산책로가 남산에는 있습니다.국립극장을 끼고 들어가는 북측순환로에서도 저는 경쾌한 지팡이 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걷는 시각 장애인들을 가끔 만납니다.자동차 위주의 삭막한 도시에서 시각 장애인들이 마음 놓고 산책하고 숲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할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했다는 사실이 뿌듯합니다.

이제 가을입니다.잠시 멈춰서서 분주한 일상에 매몰된 자신을 한 번 돌아보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먼곳도 바라 볼 때입니다.이 가을 남산을 한 번 찾아 보시기를 권합니다.남산은 서울 시민들에게내려진 축복입니다.많은 사람들이 숨쉬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산이지만 한 번 찾아 보시면 “이런 곳이 서울에 있었나.”하는 새삼스러운 느낌을 틀림없이 받게 되실 것입니다.

올해는 또 UN이 정한 ‘산의 해’입니다.국토의 66%가 산인 우리나라에서 아직 산과 가깝게 지내지 않으시다면 가을 산을 꼭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산이든 산은 마음을 맑게 하는 평화와 고요함을 안겨 줍니다.가을 산에서 잠깐의 멈춤과 사색을 통해 어쩌면 작은 행복뿐만 아니라 깊은 깨달음에 이르게 되실 분도 계시리라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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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숙/ 미디어연구소장 ysi@
2002-09-19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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