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임오년 말띠 해를 앞두고 ‘팔자 드센 말띠 딸’을갖지 않으려고 젊은 부부들이 임신을 기피하거나 수술을통해 출산 날짜를 올해 안으로 무리하게 앞당기려 하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말띠 여아 기피 풍조는 남녀 출생성비 통계상으로도 확인될 정도라 한다.
의료기술의 발달이 사주와 결합할 때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나타나는 결과의 한 단면이다.이른바 ‘팔자 드센’ 말띠 여성의 이미지는 외향성의 활동형 여성이다.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만한 투지와 자아가 강한 커리어 우먼형이다.
딸 키우는 부모들이 자신의 딸이 장차 자기 일을 가지고사회적 성취를 하기를 원한다는 조사 결과에 비추어 볼 때 말띠 딸의 기피현상은 모순되게 보인다.딸이 집안에 있기를 원하지 않지만,바깥 일하는 여성에게 요구되는 자질은극구 피하려는 모순적 심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강한 자아와 투지는 여성적이지 않다는 통념이 우리 사회에는 지배적이다.여성적이지 않으면 가정생활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통념 또한 마찬가지다.가정은 여성의희생과 인고를 요구하는데,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은 가정의 평화를 깨뜨릴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가정을 유지해가는 여성상과 말띠 여성상이 상치되는 데서 발생하는 갈등을 예비부모들은 출산의료기술을 통해 해결해보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해결일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며칠전 대학 선후배 10여명이 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학창시절 조용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면서도 야무진 성품을지녔던 한 친구는 현재 동기들 중 유일하게 전업주부로 생활하고 있었다.그녀는 결혼생활이 15년을 지날 즈음 마침내 쓰러졌다고 한다.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억누르고 가족의 입장만을 배려하는 과정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몸을 공격한 것이다.사랑하는 가족 뒷바라지에 큰 보람이 있다는의식적 정당화에 몸이 반기를 든 것이었다.친구가 건강을추스르면서 스스로 다짐한 것은 “나 자신도 돌보자”는점이었다고 한다.그렇지만 그날 친구는 말했다.“그런데그게 잘 안돼.친정 어머니가 그렇게 사셨고,그걸 보고 자란 나는 생각과는 달리 이미몸으로 엄마를 대물림해 닮아있나봐.정말 순간순간 다짐하지 않으면 나를 돌보게 되질않아.” 자신의 시간을 가족들의 시간표에 맞춰 찢어주고,가족의편안한 생활을 위해 자신의 지향과 일을 포기하는 것을 여성의 미덕으로 여기는 풍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여성이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과같은 허구적 신화이다.“좋은 것이 좋은 것”이란 말은 여성에게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20년 이후 자신이,현재 우리 노인 어머니들이 겪고 있는회한으로 인한 우울증 상태를 답습하지 않으려면,가족관계에 한정되는 정체성의 범위를 넘어서야 하고 여성의 미덕을 거스를 필요가 있다.여성이 불행한 가정이 진짜 행복한가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여성의 자기 이미지를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자기 이미지를 어디에 설정하느냐에 따라 자존감의 보루 지점이 달라지며,양보할 것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지점도 달라지기 때문이다.토끼띠나 양띠형 이미지 대신 말띠형 여성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때이다.
허라금 이대교수 여성학
의료기술의 발달이 사주와 결합할 때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나타나는 결과의 한 단면이다.이른바 ‘팔자 드센’ 말띠 여성의 이미지는 외향성의 활동형 여성이다.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만한 투지와 자아가 강한 커리어 우먼형이다.
딸 키우는 부모들이 자신의 딸이 장차 자기 일을 가지고사회적 성취를 하기를 원한다는 조사 결과에 비추어 볼 때 말띠 딸의 기피현상은 모순되게 보인다.딸이 집안에 있기를 원하지 않지만,바깥 일하는 여성에게 요구되는 자질은극구 피하려는 모순적 심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강한 자아와 투지는 여성적이지 않다는 통념이 우리 사회에는 지배적이다.여성적이지 않으면 가정생활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통념 또한 마찬가지다.가정은 여성의희생과 인고를 요구하는데,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은 가정의 평화를 깨뜨릴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가정을 유지해가는 여성상과 말띠 여성상이 상치되는 데서 발생하는 갈등을 예비부모들은 출산의료기술을 통해 해결해보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해결일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며칠전 대학 선후배 10여명이 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학창시절 조용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면서도 야무진 성품을지녔던 한 친구는 현재 동기들 중 유일하게 전업주부로 생활하고 있었다.그녀는 결혼생활이 15년을 지날 즈음 마침내 쓰러졌다고 한다.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억누르고 가족의 입장만을 배려하는 과정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몸을 공격한 것이다.사랑하는 가족 뒷바라지에 큰 보람이 있다는의식적 정당화에 몸이 반기를 든 것이었다.친구가 건강을추스르면서 스스로 다짐한 것은 “나 자신도 돌보자”는점이었다고 한다.그렇지만 그날 친구는 말했다.“그런데그게 잘 안돼.친정 어머니가 그렇게 사셨고,그걸 보고 자란 나는 생각과는 달리 이미몸으로 엄마를 대물림해 닮아있나봐.정말 순간순간 다짐하지 않으면 나를 돌보게 되질않아.” 자신의 시간을 가족들의 시간표에 맞춰 찢어주고,가족의편안한 생활을 위해 자신의 지향과 일을 포기하는 것을 여성의 미덕으로 여기는 풍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여성이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과같은 허구적 신화이다.“좋은 것이 좋은 것”이란 말은 여성에게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20년 이후 자신이,현재 우리 노인 어머니들이 겪고 있는회한으로 인한 우울증 상태를 답습하지 않으려면,가족관계에 한정되는 정체성의 범위를 넘어서야 하고 여성의 미덕을 거스를 필요가 있다.여성이 불행한 가정이 진짜 행복한가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여성의 자기 이미지를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자기 이미지를 어디에 설정하느냐에 따라 자존감의 보루 지점이 달라지며,양보할 것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지점도 달라지기 때문이다.토끼띠나 양띠형 이미지 대신 말띠형 여성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때이다.
허라금 이대교수 여성학
2001-12-17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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