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테러 참사가 요즘 세상 사람들을 예언의 신비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두 개의 110층짜리 거대 빌딩이 불을 뿜으며 차례로 붕괴돼 가는 모습이 1500년대에 살았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엇비슷했기 때문이다.여기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무차별 보복 공격을 공언하면서 3차 대전으로 비화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보태져 더욱 관심을 쏠리게 하고있다.
이는 기상천외의 대참사 충격이 불러일으킨 사회 불안심리증후군의 하나인 것 같다.일찍이 공상 만화에서조차 다뤄지지 못했던 현실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소화해 보려는 안간힘일 것이다.태양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일식을 주술적으로설명하려 했던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 같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불안심리가 팽배할 때 예언이 난무했고 보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경제에 대한 최근의 불안심리도 거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기(秘記)의 예언은 간단없이 이어져 왔다.뿌리는 다르지만 패러다임은 같았다.하나같이 지극히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거나 조건을 붙이는방법 등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후세의 해석자가 귀에 걸면 귀걸이,코에걸면 코걸이식의 자의적인 설명을 얼마든지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임진란을 앞두고 민간에선 난리를 모면하려면 ‘송’(松)자라야 한다는 예언이 퍼져 모두 소나무 산속으로 숨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이었다느니 하는 설명들이 다 그렇다.
또 예언의 여러 구절 가운데 엇비슷한 대목만을 선별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보편화하는 특징도 있다.노스트라다무스의 ‘번개’는 여객기 폭발 화염이 됐고 ‘두 형제‘는 세계무역센터의 두 빌딩에 대입됐다.그렇다면 ‘신의 도시’라거나‘거대한 지도자의 굴복’도 설명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비결’들이 점지했던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한두 곳이 난리의 피해가 적었다 해서 제대로 된 예언으로 간주해야 하는가.십승지로 지목되지 않았음에도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비기’의 해프닝으로 말하면 조선조 정감록의 ‘정씨 왕’을 믿고 변란을 도모했던 정여립(鄭汝立) 사건이 압권일것이다.뉴욕의 대참사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그렇다고 냉정을 잃어서는 안된다.허무맹랑한 생각에 젖어 판단을 흐려서는 안되는 것이다.패배적 운명론으로 이어지기 십상인 신비주의적 예언에 몰입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정인학 논설위원
이는 기상천외의 대참사 충격이 불러일으킨 사회 불안심리증후군의 하나인 것 같다.일찍이 공상 만화에서조차 다뤄지지 못했던 현실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소화해 보려는 안간힘일 것이다.태양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일식을 주술적으로설명하려 했던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 같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불안심리가 팽배할 때 예언이 난무했고 보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경제에 대한 최근의 불안심리도 거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기(秘記)의 예언은 간단없이 이어져 왔다.뿌리는 다르지만 패러다임은 같았다.하나같이 지극히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거나 조건을 붙이는방법 등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후세의 해석자가 귀에 걸면 귀걸이,코에걸면 코걸이식의 자의적인 설명을 얼마든지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임진란을 앞두고 민간에선 난리를 모면하려면 ‘송’(松)자라야 한다는 예언이 퍼져 모두 소나무 산속으로 숨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이었다느니 하는 설명들이 다 그렇다.
또 예언의 여러 구절 가운데 엇비슷한 대목만을 선별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보편화하는 특징도 있다.노스트라다무스의 ‘번개’는 여객기 폭발 화염이 됐고 ‘두 형제‘는 세계무역센터의 두 빌딩에 대입됐다.그렇다면 ‘신의 도시’라거나‘거대한 지도자의 굴복’도 설명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비결’들이 점지했던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한두 곳이 난리의 피해가 적었다 해서 제대로 된 예언으로 간주해야 하는가.십승지로 지목되지 않았음에도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비기’의 해프닝으로 말하면 조선조 정감록의 ‘정씨 왕’을 믿고 변란을 도모했던 정여립(鄭汝立) 사건이 압권일것이다.뉴욕의 대참사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그렇다고 냉정을 잃어서는 안된다.허무맹랑한 생각에 젖어 판단을 흐려서는 안되는 것이다.패배적 운명론으로 이어지기 십상인 신비주의적 예언에 몰입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정인학 논설위원
2001-09-15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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