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선언] 미당의 죽음과 문인의 의식

[여성 선언] 미당의 죽음과 문인의 의식

노혜경 기자 기자
입력 2001-01-08 00:00
수정 2001-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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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천주교가 박해받은 시절의 기록을 보면,신자들이 관리들 앞에끌려가 묵주에 침을 뱉든가 마리아상을 밟고 걸어보라는 요구를 받는대목이 나온다. 스스로 신자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고 증명해야만 한다는,존재의 신원에 대한 강요가 참으로 섬뜩하게 느껴진 대목이었다.

신앙의 자유가 개인의 권리가 아닌 시절 남다른 길을 택한 사람들이도달해야 한 삶과 죽음의 막다른 벼랑은 ‘진실과 죽음’‘거짓과 삶’이라는 기묘한 조합을 우리 생의 한 원리로 인식시키기에 족했나보다.

최근 문인들과 지식인들은 한 노시인의 죽음 앞에서 비슷한 질문에봉착하게 되었다.일제강점기에는 학병입대 선동의 시를 썼고 5공 시절에는 독재자 얼굴이 “태양처럼 빛난다”라는 시를 쓴 바로 그 사람,광주항쟁 피해자들을 향해 “공권력의 적법한 행위이므로 배상 불가”라고 망언을 퍼부은 바로 그 사람,미당 서정주를 여전히 빼어난시인으로 추모할 것인가,아니면 버릴 것인가.

이것이 저 섬뜩한 질문과 닮아 있는 것은,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라는 점 말고도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그 선택을 한 바로그 사람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가 명백히 드러난다는 점에서이다.

나는 지난 여름 미당의 ‘국화옆에서’를 둘러싸고 벌어진 어용시비를 바라보며,친일·친독재 부역자들의 문학을 문학사 내부에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문학 가치평가의 메커니즘이 고장난 것이라는 요지의글을 발표한 바 있다.그러나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았다.물론,미당 문학에 대한 성토나 비판이 그동안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1980년대에 미당은 분명 젊은 작가들에 의해 배척된 사람이었다.그러나 90년대 들어 슬그머니 복권된 미당을 둘러싸고 오늘 현장의 문학을 선택하고 평가할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 보여준 상찬이나 침묵은 도무지그 이유를 가늠할 길 없는 신비로까지 보인다.그 무거운 침묵을 타고미당은 가장 찬양받는 국민시인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 그 미당이 죽었다.당신들은 입을 열어 무슨 말이라도적어야 한다.미당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보입니까? 이제야말로 미당에대한 논평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그러므로 미당의 죽음은,그자체로서 바로 나 자신을 비롯한 문인·지식인들의 정체를 시험하는 리트머스용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미당을 밟지 않는 것,그것은현재의 안락함을 그대로 이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며,자기 신앙을 배반한 대가로 목숨을 이어간 사람들,살아서 영혼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현재형 판본인 것이다.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거행하는,미당의 죽음에 대한 애도라는의례의 성격과 수위를 감상하면서 나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패한정신에 의해 조직되는지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비애를 맛본다.

일반 시민의 목소리라 할 수 있는 인터넷상의 반응이 압도적으로 미당 문학에 대한 부정과 그의 삶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인 것과 비교해볼 때,소위 주류언론의 꽃다발 바치기는 미당 옹호가 기득권 수호와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미당에 대한부정이 자기 삶에 대한 부정이 아닌 바에야,어떻게 찬양하기까지 하는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가스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낭만적으로 향수하며 바그너의 오페라를 듣는 아우슈비츠의 장교는 아름다운가? 한 사람의 생이 지금 우리사회 지식인의 신원을 결정짓는 척도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미당의 죽음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가 지금너무나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아마도 앞으로는 생과 문학을 분리시키고도 당당할 수 있는 문인이 다시는 불가능하리라.미당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예사롭지 않은 공방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은 바로이런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 죽음이 던지는 질문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그리고 지켜보아야 한다.누가 미당을 옹호하는가,그리고 왜? 바로 그 사람이 어떤 자인가를 우리가 아는 것은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미당의 죽음이 가져올 파장은 바로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미당에 대한 추모의 수위야말로 조선일보 문제에도,과거청산 문제에도 한사코 발언을 꺼려온 문인들이 제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내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 “의식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노혜경 시인
2001-01-08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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