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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김일성 회고록 판매 중지로 ‘보안법’ 다시 논란

[핵심은] 김일성 회고록 판매 중지로 ‘보안법’ 다시 논란

곽혜진 기자
입력 2021-04-28 12:23
업데이트 2021-04-2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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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국내 출간
교보문고 등 대형 온라인서점 잇따라 판매 중지
시민단체, 회고록 판매·배포 금지 가처분신청
표현의 자유 억압하는 ‘보안법’ 비판 의견도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도서출판 민족사랑방 제공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도서출판 민족사랑방 제공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수영 시인이 국가보안법(보안법)을 규탄하고자 1960년에 쓴 시다. 김일성을 찬양하든 비판하든 그것은 개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자유이며 국가가 이를 압제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보안법 존폐에 대한 논쟁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최근 교보문고가 북한 김일성 주석의 항일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판매를 자체적으로 중단하면서 보안법이 다시금 수면 위로 올랐다.

핵심 ① 독자 처벌 우려해 김일성 회고록 판매 중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1992년 북한에서 김일성의 80번째 생일을 맞아 대외 선전용으로 발간했다. 김 주석의 출생부터 해방 전 항일무장투쟁 기간을 다루었다. 북한에서 8권의 책으로 출간한 내용을 지난 1일 국내 출판사 민족사랑방에서 그대로 옮긴 것이다.

회고록이 출간되자 국내 실정법 위반 논란이 일었다. 일부 시민단체들이 법원에 판매·배포를 금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경찰과 통일부도 해당 책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보안법이나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소지가 있었는지 검토 중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간행물윤리위원회에 이 책의 심의를 요청한 상태다.

과거 사단법인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을 지낸 민족사랑방 대표 김승균씨는 회고록을 연구기관 등에 공급하기 위해 9년 전 당국의 승인을 받고 북한에서 들여왔다고 했다. 그는 “세계 여러 나라말로 번역 출판된 책으로, 남한은 출판 허가제가 아니라 괜찮다고 봤는데 본의 아니게 논란이 커져 송구하다”며 “경찰이나 통일부 등과 협의할 게 있으면 하겠다”고 말했다.

800여 개의 국내 출판사가 조합원으로 가입한 출판인단체 한국출판협동조합을 통해 공급됐다. 출판사와 서점 간 직거래 방식아 아니어서 서점이 선별해 들일 수 없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책이 입고되고도 한동안은 판매되지 않다가 한 언론사의 ‘이적표현물 논란’ 보도가 나가면서 소량 판매됐다. 교보문고를 비롯해 예스24와 알라딘에서도 각각 10여부씩 판매됐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출간 직후에는 온라인서점뿐만 아니라 매장에도 비치해 판매하고 있었지만, 한 언론사에서 국보법 위반 문제를 제기해 23일부터 신규 판매를 중단하게 됐다”며 “대법원이 이적표현물로 판단한 책을 독자가 살 경우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교보문고는 법원이나 간행물윤리위원회의 판단이 내려지면 판매 여부를 다시 결정할 방침이다.

다른 인터넷서점들도 줄줄이 판매를 중단했다. 예스24 측은 “이적표현물 논란이 일고 고객들의 항의가 쏟아졌다”면서도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판매 적합성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고 한국출판협동조합에서 책을 공급하지 않겠다고 통보해 어쩔 수 없이 중단한 것”이라고 했다.

알라딘 관계자 역시 “수급이 안 되는데 어떻게 판매하겠냐”며 26일부터 판매를 중단했다고 전했다. 이 밖에 영풍문고, 인터파크 도서, 반디앤루니스 등 다른 대형 온라인서점들도 책 제목을 검색하면 상품 정보가 없다고 나오거나 품절됐다는 안내 문구가 나온다.
‘세기와 더불어’ 판매·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 측 대리인 도태우 변호사(왼쪽)와 문수정 변호사(오른쪽)가 27일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21.4.28 서울신문 DB
‘세기와 더불어’ 판매·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 측 대리인 도태우 변호사(왼쪽)와 문수정 변호사(오른쪽)가 27일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21.4.28 서울신문 DB
핵심 ② 시대 변화 따라가지 못하는 국가보안법 잔존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는 행위를 할 목적으로 문서·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수입·판매·소지·반포·판매·취득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국가보안법 7조 5항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단순히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것만으로 처벌하는 것은 아니다. 명백한 이적 목적이 있어야 한다. 북한 문헌 등 학술 목적의 자료로 취급 인가를 받은 대학·연구기관·도서관 등이 관련 출판물을 보관하고, 이를 별도로 허가 절차를 밟은 사람이 열람하는 것은 문제없다.

서울서부지법 민사합의21부(부장 박병태)는 27일 ‘세기와 더불어’ 8권에 대한 판매·배포 금지 가처분신청 첫 심문기일을 진행했다.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법치와 자유민주주의 연대(NPK) 측 도태우 변호사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책이 합법적 채널로 유통되는 것은 헌법에 나온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에 배치된다”며 “국가보안법을 사실상 무력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은 대법원에서 이미 이적표현물로 규정한 바 있다. 2011년 대법원은 허가 없이 방북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모씨에 대한 원심판결(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확정하면서 “‘세기와 더불어’를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정씨는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북한 서적 전문판매점에서 ‘세기와 더불어’를 구매해 보관하고 있었다.

간행물윤리위도 김일성 회고록을 유해간행물로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간행물윤리위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면 부정하거나 체제전복 활동을 고무 또는 선동해 국가의 안전이나 공공질서를 뚜렷이 해치는 것’으로 ‘보편타당한 역사적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민족사적 정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에 해당하면 유해간행물로 본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북한 관련 콘텐츠를 접하기 쉬워진 환경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장 유튜브만 검색해봐도 북한에서 출판된 다양한 책들을 소개하는 영상이 수두룩하다. 정보가 열려 있어야 실상을 파악하고 때론 더욱 경계할 수 있다. 단순히 북한 권력자를 미화한 콘텐츠를 보고 동조할 만큼 인간은 단순하지 않으며 시민의식도 높아졌다.

북한 관련 사안에 민감한 보수정당들도 이번엔 우려를 표했다. 박기녕 국민의힘 부대변인은 논평에서 “(김일성 회고록은) 북한의 허황된 김일성 우상화의 실체를 깨닫게 해줄 마중물이 될 수 있다”며 “체제의 우월성을 믿고 국민에게 판단을 맡기자”고 제안했다. 같은 당 하태경 의원도 페이스북에 “국민의식을 믿고 표현의 자유를 적극 보장하자”는 글을 올렸다.

법도 사람 간 약속이라 시류를 타고 변화한다. 1948년 제정돼 군부독재시절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수많은 시민을 탄압하는 데 악용돼온 보안법도 이제 그 필요성을 돌이켜볼 때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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