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역사’가 지향하는 방향은 같았지만 구체적인 역사서술에 있어서는 한국·중국·일본 참여자들 사이에 적잖은 이견이 있었다. 지난 3년여동안 11차례나 세 나라를 오가며 논의를 했지만 쟁점들이 모두 해소되지는 않았다.
특히 ‘일본의 한국 강점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처음부터 문제였다. 일본측은 ‘병합(倂合)’을 주장했고 중국은 ‘합병(合倂)’이란 표현을 내놓았다. 한국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강점(强占)’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일본 안대로 ‘한국 병합’으로 표현하되 이 부분은 별도 칼럼을 통해 서로의 인식차를 서술했다.
또 한·일 양국은 근현대사 시기 구분에서 의견차를 보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과 청일·러일전쟁 등 일본의 주요 사건을 기준으로 시기를 구분하려 했다. 반면 한국과 중국은 3국 각각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과 일제의 침략전쟁이라는 상호관계를 함께 고려해 시기를 구분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일본이 한국·중국측 의견을 의견을 수용했다.
인식 차이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도 있었다.3·1운동이 5·4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한국측 주장에 대해 중국측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중국 지식인과 학생은 한국에서 일어난 3·1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중국인들에게 반일 투쟁을 호소했다.”로 정리했다.
일본 민중도 전쟁의 피해자인가를 놓고도 설전을 벌였다. 한국과 중국측은 가해자적 측면을 강조했지만 일본은 피해자적 측면도 바라봐야 한다고 대립했다. 결국 교재에서는 일본 민중의 가해와 피해의 양면성을 서술하게 됐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특히 ‘일본의 한국 강점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처음부터 문제였다. 일본측은 ‘병합(倂合)’을 주장했고 중국은 ‘합병(合倂)’이란 표현을 내놓았다. 한국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강점(强占)’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일본 안대로 ‘한국 병합’으로 표현하되 이 부분은 별도 칼럼을 통해 서로의 인식차를 서술했다.
또 한·일 양국은 근현대사 시기 구분에서 의견차를 보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과 청일·러일전쟁 등 일본의 주요 사건을 기준으로 시기를 구분하려 했다. 반면 한국과 중국은 3국 각각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과 일제의 침략전쟁이라는 상호관계를 함께 고려해 시기를 구분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일본이 한국·중국측 의견을 의견을 수용했다.
인식 차이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도 있었다.3·1운동이 5·4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한국측 주장에 대해 중국측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중국 지식인과 학생은 한국에서 일어난 3·1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중국인들에게 반일 투쟁을 호소했다.”로 정리했다.
일본 민중도 전쟁의 피해자인가를 놓고도 설전을 벌였다. 한국과 중국측은 가해자적 측면을 강조했지만 일본은 피해자적 측면도 바라봐야 한다고 대립했다. 결국 교재에서는 일본 민중의 가해와 피해의 양면성을 서술하게 됐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2005-05-27 39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