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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대사 막판까지 유엔 동시가입 몰랐다

北대사 막판까지 유엔 동시가입 몰랐다

입력 2011-08-01 00:00
업데이트 2011-08-01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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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창희 前차관 회고..북ㆍ중 대사 본국서 귀띔도

“북한 대사가 오전 중으로 만나 확인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현충일(메모리얼 데이)이었던 1991년 5월 27일. 외출을 준비하는 노창희 유엔 주재 대사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우리의 접촉 요구를 거부해왔던 박길연 유엔 주재 북한대사가 급히 만나자는 예상 밖의 내용이었다.

”연내에 기필코 유엔에 가입하겠다. 남북 동시 가입이 안되면 단독 가입이라도 하겠다”라고 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연두 기자회견에 천명함에 따라 외교부는 그해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을 위해 그야말로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고, 이런 노력은 국제적으로 상당한 공감을 얻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시 분단이 영구화된다”는 논리를 펴면서 강력히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걸려온 뜻밖의 전화라 노 대사는 ‘북한의 입장이 바뀌었나’라는 기대를 하며 “당장 만나자”는 답신을 보냈다. 특히 그 직전에 중국의 리펑(李鵬) 총리가 평양을 방문했었기 때문에 노 대사는 더더욱 북한과 중국의 변화 가능성을 주시해오던 차였다.

그러나 유엔 본부 앞 플라자호텔에서 이뤄진 박 대사와의 만남은 오전 10시에 시작돼 10분 만에 허무하게 끝났다.

박 대사는 그 자리에서 ‘평양의 지시’라면서 “첫째, 단일의석 공동가입이라는 합리적 제의를 왜 거부합니까”, “둘째, 남측은 조국 분단을 영구화하는 북ㆍ남 유엔 동시가입을 끝까지 고집할 생각입니까”, “마지막으로, 동시 가입이 안되면 단독 가입을 강행하겠다는 것입니까”라며 3가지 사안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을 차례로 물었다.

그런 박 대사의 질문은 할 필요가 없는 물음이었다. 노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을 비롯, 우리 정부가 수차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혔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 대사는 앞의 두 질문에 대해 짤막하게 답한 뒤 “북한은 착각하지 말라”면서 “대통령이 약속했는데 그것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어렵게 만난 남북의 두 대사는 입장차만 확인한 채 헤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예상 밖에도 박 대사가 돌아간 뒤 10시간도 안 돼 ‘백기투항’했다. 노 대사와 박 대사가 만난 그날 저녁 북한이 유엔에 한국과 동시 가입하겠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외무성 명의로 발표한 것이다.

특히 북한은 이 성명에서 “남조선 당국자에 의해 조성된 일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유엔 가입의 길을 택했다”고 밝혀 한국의 외교적 노력이 북한의 태도 변화를 강제한 계기가 됐음을 시사했다.

우리 정부가 북한의 입장을 번복시키는 외교사적인 쾌거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유엔 가입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설정하고 전(全) 정부 차원의 역량을 집중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특히 정부는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 현장의 야전 사령관인 노 대사에게 사실상 전권을 부여해 다른 회원국과의 적극적인 교섭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는 막판까지 유엔 동시가입에 대한 감(感)을 잡지 못했던 박 북한대사와 리다오유(李道豫) 주 유엔 중국대사의 처지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대목이다. 박, 리 대사는 북한이 ‘백기투항’을 발표하기 바로 직전에 가서야 자국 정부가 유엔 동시가입을 받아들이기로 방침을 바꿨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북한 외무성의 공식 발표가 있기 직전까지 박 북한대사는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고수했고, 리 중국대사도 남북 유엔 동시가입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리 중국 대사의 경우 북한의 발표가 있기 직전인 24일 노 대사와 면담을 했지만 자국 정부의 입장 변화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비외교적으로’ 노 대사를 대했다. 그는 “우리의 유엔 가입은 베이징의 태도에 달렸다”는 노 대사의 협조 부탁에 “그것은 평양과 상의해야 할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또 리펑 총리의 평양 방문에 대해서도 “평양에서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저는 모릅니다”고 언급, 사실상 한국과 대화할 뜻이 없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태도는 중국 정부의 당시 바뀐 입장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사실 ‘물증’은 없었지만 평양을 찾은 리펑 총리가 북한에 “한국의 유엔 가입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라는 입장을 전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고 이는 북한의 발표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유엔의 신규 회원국 가입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에 따라 총회에서 결정되는 방식으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임이사국 5개국 중 중국만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남북간 합의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며 북한을 두둔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노력으로 남북 유엔 동시가입이 국제적인 대세가 되자 중국도 입장을 바꿨지만 리 대사는 이런 변화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주 유엔대사로 활동했던 노창희 전 차관은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리 대사는 나와 만났을 때 리펑 총리의 방북결과에 대해 베이징으로부터 아무런 귀띔도 받지 못했고 그래서 비외교적으로 처신한 것”이라면서 “그 점에서는 박 대사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발표 이후 실제 가입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착실히 ‘상황관리’를 해나갔다. 특히 미국이 인권문제 등의 이유로 북한의 유엔 가입을 반대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던 북한에 노 대사는 ‘독일식 신청방식’을 제시하면서 북한을 안심시켰다.

동ㆍ서독은 1973년 유엔 가입 당시 신청서는 별도로 제출했지만 이 두 신청서는 하나의 안건으로 안보리와 총회에 상정돼 심의를 받았다. 이 방식대로 하면 북한의 우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없어 북한도 이를 받아들였다.

노 대사는 또 우리 정부의 유엔 가입신청서 제출시기를 노출, 북한이 먼저 신청서를 내 자존심을 세울 수 있도록 세심히 배려해주는 전략도 구사, 9월17일 드디어 뉴욕 유엔 본부 앞에 태극기를 다는 데 성공했다.

◇노창희 전 차관 = 부드럽고 원만한 성품의 수재형 정통 외교관이란 평을 듣고 있다. 11회 고등고시에 수석 합격, 1960년 외무부에 들어간 그는 장ㆍ차관 비서관, 법무관, 주 캐나다 대사관 서기관ㆍ영사, 조약과장, 미주국 심의관 등을 거치며 외교관 실무 경험을 익혔다.

이어 조약국장으로 근무하던 1980년 ‘외무행정쇄신 특별작업반’을 맡아 실무라인에서 외무공무원법 제정을 이끌었다. 또 1981년 노태우 특사(당시 정무장관)가 우리나라의 88 서울 올림픽 유치 협조에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2개월간 유럽 등 15개국을 순방할 때 수행하면서 의전ㆍ통역 등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이 인연으로 1988년 6공화국 출범과 함께 노태우 대통령의 의전수석비서관으로 발탁돼 3년 가까이 청와대에서 근무, 당시 주요 정상회담의 통역을 맡으면서 노 대통령의 북방 외교를 보좌했다.

또 1991년 주 유엔 옵서버 대사로 파견돼 현장 사령관으로 1991년 최대 국정과제였던 남북 유엔 동시가입을 성사시키는 외교적 업적을 만들어냈다. 이어 외무부 차관으로 1992년 한ㆍ중 수교회담 수석대표를 맡아 중국과의 수교로 노 대통령이 북방외교 대단원을 마무리하는데 기여했다.

▲경남 합천(73) ▲서울대 상대 ▲주 미국대사관 공사 ▲주 나이지리아 대사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주 유엔 대사 ▲외무부 차관 ▲주 영국대사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고문 ▲한서대 초빙교수 ▲아시아ㆍ유럽재단 이사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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