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비무장지대(DMZ) 고라니들의 일상은 ‘평화’와 ‘불안’이 교차한다.인적이 떠난 단절된 환경 속에서 눈에 띄는 천적도 없고,주변 산야의 풍부한 물과 나무뿌리 등 널린 먹이는 여느 곳 고라니들이 부러워할 만하다.그러나 지뢰와 불발탄에 희생되거나 ,연례행사처럼 매년 봄 계속되는 비무장지대의 산불에 쫓기는 등 그네들이라고 고초를 겪지 않는 건 아니다.남방한계선 철책 인근 남쪽에 자리를 잡았거나,간혹 수로 아래 철책 구멍을 통해 남쪽으로 넘어온 녀석들은 농부들의 농작물을 탐내다가 올무에 희생되고,농로와 작전로를 지나는 차에 치여 비명횡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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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잎새 사이,수컷 고라니가 귀를 쫑긋… 초록빛 잎새 사이,수컷 고라니가 귀를 쫑긋 세운 채 카메라 렌즈에 눈을 맞췄다.억센 털과 날카로운 송곳니에 나름대로 위용을 담았지만,녀석의 본성은 큼직하니 선한 눈망울에 그대로 드러난다.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남방한계선 인근에서 7월1일 촬영.
고성 이종원기자 jongw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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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잎새 사이,수컷 고라니가 귀를 쫑긋…
초록빛 잎새 사이,수컷 고라니가 귀를 쫑긋 세운 채 카메라 렌즈에 눈을 맞췄다.억센 털과 날카로운 송곳니에 나름대로 위용을 담았지만,녀석의 본성은 큼직하니 선한 눈망울에 그대로 드러난다.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남방한계선 인근에서 7월1일 촬영.
고성 이종원기자 jongwon@seoul.co.kr
●자동차에 뛰어들어 비명횡사
6월11일 낮.강원도 화천군 오작교 하류 2㎞ 지점 북한강 상류에 어미 고라니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폭 100여m의 강변 모래밭,토종자라가 90도 가까이 곤두서서 수영을 즐기고 있는 웅덩이 옆을 지나 껑충거리는 특유의 몸짓으로 오작교 방향을 향해 강을 따라 5분여를 유유히 달리다 시야에서 사라졌다.고라니는 수영을 잘하니 녀석도 수영하러 나왔던가 보다.이 고라니는 탐사대에 DMZ 야생 고라니의 평화스러운 모습을 가장 오래 드러내 보인 녀석이다.탐사대는 탐사기간 동안 거의 매일 고라니를 1∼2마리씩 목격했다.그러나 미확인 지뢰지대 풀숲에서 ‘두두둑’ 소리를 내며 불쑥 등장해 아취형 등짝만을 보여주고 달아나거나,강변 억새 숲속에서 쉬고 있다 풀잎을 가르며 순식간에 달아나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6월10일 임진강 초평도 너머 장단반도의 서부전선 이중 철책 사이에서 목격된 고라니는 500여m 남짓한 구간을 동서로 왔다갔다 배회하는 행동을 반복했다.남방한계선 너머 북쪽에서 살다가 철책을 넘어와 길을 잃은 녀석으로 보였다.
영어로 물사슴(Water Deer)이라 불릴 정도로 물과 친숙한 고라니는 DMZ에서도 대부분 호수나 강변 숲에서 목격됐다.경기도 연천 필승교 남방한계선 임진강 철책 하류 100여m 풀숲의 고라니는 임진강가의 갈대숲을 터전으로 삼았다.
강화도 북부 해안의 창우리에서 본 어미와 새끼 2마리의 고라니 모자는 묵논 습지를,파주 스토리사격장내 풀숲을 갑자기 뛰쳐나와 탐사대를 놀라게 한 고라니는 미군 사격장내 피탄지점 자연습지를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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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서식밀도는 6·25전쟁 이전에 비해 한동안 현저히 줄었다가 생피를 마시고 보약재로 쓰려고 성행했던 밀렵을 엄격하게 단속한 이후 근년들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개체수가 늘고 특히 DMZ에선 흔한 짐승이다.그래서인지 멸종위기종이 돼 버린 산양 등과는 달리 고라니의 습성에 대한 집요한 연구결과를 찾기는 힘들다.
지난달 6일 밤 마을앞 도로에서 고라니를 차로 쳤다는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이장 김동일(42)씨는 “마을 사람들도 가끔 고라니와 부딪치는데 녀석들이 모두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을 향해 달려든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그러나 전방부대 장병들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경기도 연천의 DMZ 철책담당 중대장은 “10㎞ 순찰로를 밤중에 한번 돌면 보통 10여마리를 목격한다.군용 손전등을 가까이 들이대면 놀라서 얼어붙은 듯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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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다리 남쪽 장단반도 습지에서 고라니… 자유의 다리 남쪽 장단반도 습지에서 고라니가 갈대숲을 가르며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다.북한강 상류의 고라니는 마치 산책을 나온 듯 맑은 물에 발을 담근 채 한낮의 여유로움을 즐겼다.
파주·화천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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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다리 남쪽 장단반도 습지에서 고라니…
자유의 다리 남쪽 장단반도 습지에서 고라니가 갈대숲을 가르며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다.북한강 상류의 고라니는 마치 산책을 나온 듯 맑은 물에 발을 담근 채 한낮의 여유로움을 즐겼다.
파주·화천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몸길이 1∼1.2m의 왜소한 체격에 등이 휘어 때론 옹졸해 보이기조차 하는 고라니는 위험에 처하면 마냥 줄행랑을 놓는 ‘소심하고 아둔한 약자’다.먹이를 저축하거나 겨울잠을 자지 않으므로 겨울은 시련의 시기다.인가도 경작지도 없는 비무장지대 고라니에겐 특히나 잔인한 계절이다.DMZ 장병들은 폭설이 심한 겨울엔 배고픔과 추위에 지쳐 숨진 고라니를 가끔 목격한다.
●논·밭 망쳐 농민들과 ‘원수지간’
탐사가 진행되던 6월초 남북이 서로 철책에 설치된 선전방송용 대형 스피커와 전광판을 철거하기로 합의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소음과 야간 불빛에 시달리던 고라니에게도 좋은 소식일 것이다.그러나 민통선 지역을 출입하는 농민들과 고라니는 불행하게도 ‘원수지간’이 되어간다.벼와 콩 등 밭작물의 새순을 잘라먹거나 논 군데군데 자리를 차지하고 눌러앉는 고라니의 등쌀에 농민들은 정부가 피해를 보상하라고 아우성이다.툭하면 논두렁을 무너뜨리고 가을에 볏단을 짓밟곤 하는 멧돼지에 대한 불만만큼이나 크다.고라니는 ‘겁쟁이’ 노루보다도 작고 약하지만 인적없는 땅 DMZ에서 꿋꿋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노루나 사슴보다 더욱 번성해 가고 있다.우리에게 “인간과 자연의 공존한계는 어디인가.”를 되물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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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습지를 곳… 비무장지대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습지를 곳곳에 품고 있다.6월13일 이중철책 안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뛰어놀다 취재팀이 나타나자 부랴부랴 종적을 감췄다.
연천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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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습지를 곳…
비무장지대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습지를 곳곳에 품고 있다.6월13일 이중철책 안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뛰어놀다 취재팀이 나타나자 부랴부랴 종적을 감췄다.
연천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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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은 조그만 인기척에도 금세 꽁지를 보이며… 꿩은 조그만 인기척에도 금세 꽁지를 보이며 푸드득 날아올라 취재팀을 애태웠다.목을 길게 뺀 장끼(오른쪽)와 먹이를 쪼는 까투리를 어렵사리 촬영했다.
연천 이종원기자 jongw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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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은 조그만 인기척에도 금세 꽁지를 보이며…
꿩은 조그만 인기척에도 금세 꽁지를 보이며 푸드득 날아올라 취재팀을 애태웠다.목을 길게 뺀 장끼(오른쪽)와 먹이를 쪼는 까투리를 어렵사리 촬영했다.
연천 이종원기자 jongwon@seoul.co.kr
화천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전문가 칼럼
겨울철에도 눈이 말끔히 치워진 길을 따라 민간인통제선 지역으로 들어서면 길 옆 눈이 쌓인 곳에 야생동물들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멧돼지를 비롯해 노루나 고라니가 대부분이지만 야생동물의 발자국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다.어쩌다 산양의 발자국이라도 만날 때면 기쁨은 더욱 커지고 발자국을 따라 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다.그나마 나라 안에서 야생동물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은 비무장지대와 민간인 통제구역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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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그림 설악녹색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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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그림 설악녹색연합 대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따라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남북이 군사분계선으로부터 2㎞씩 물러남으로써 넓이가 6400만 평에 이르는 드넓은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진 것이다.군사분계선은 서쪽으로 한강 하구의 교동도에서부터 판문점을 지나 중부지방의 철원,양구,인제와 동해안의 고성에 이르는 248㎞ 길이로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다.민간인통제구역은 비무장지대의 남방한계선으로부터 지역에 따라 5∼20㎞ 밖에 그어진 민간인통제선 안의 지역을 말하며 비무장지대 일대의 군 작전 및 군사시설보호와 보안유지를 목적으로 민간인 출입을 제한하는 구역이다.
휴전 이후 사람들의 간섭을 덜 받음으로써 어느 정도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비무장지대와 민간인 통제구역은 생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야생동물만 보더라도 남한 지역에서는 멸종된 것으로 짐작되는 반달곰,표범,여우와 같은 종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멸종위기종인 산양을 비롯한 수달의 흔적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먹이를 찾아 산을 오르는 멧돼지와 노루,고라니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겨울철이면 강원도 고성 오소동과 고진동 계곡에서는 산양이 무리지어 나타나 군인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으며 겨울을 넘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자연 상태에서 야생동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생태계의 건강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몸담아 살아가고 있는 곳의 자연은 야생동물의 모습은 그 흔적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건강함을 잃었고 우리들의 삶도 아픔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야생동물이 살 수 없는 땅은 우리네 인간들도 살 수 없다.야생동물이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는 비무장지대와 민간인 통제구역만이 우리들에게 가냘픈 희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박그림 설악녹색연합대표
2004-07-2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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