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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의 오솔길] 라면 예찬

[이재무의 오솔길] 라면 예찬

입력 2018-12-31 16:50
업데이트 2019-01-01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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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에게 라면은 구황식품이었다. 1960~70년대 시골에 처음 들어온 라면은 단박에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라면은 중독성이 강한 음식이었다. 당시엔 라면이 국수보다 훨씬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어머니는 여름날 특식으로 국수에 라면을 섞여 끓이곤 했는데, 아버지의 사발에는 항상 더 많은 양의 라면 사리가 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라면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돼 서민들이 즐겨 먹게 됐다. 너나없이 궁핍한 시절 라면이 서민들 식생활에 기여한 공로가 실로 적지 않았다.
이재무 시인
이재무 시인
지금에 와서도 라면은 서민들이 일용하는 양식 중 하나다. 나 역시도 라면을 즐겨 먹는 편이다. 58년생인 내가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라면을 먹는 셈이니 결코 적다고 볼 수 없다. 허기질 때 먹고, 적적할 때 먹고, 슬플 때도 나는 라면을 먹는다. 외국 여행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찾는 음식도 라면이다. 매콤한 라면 국물을 들이켜면 타국에서 먹은, 느끼한 음식 때문에 더부룩했던 속이 거짓말처럼 말끔하게 가시는 기분이 드는 것은 결코 나만이 아닐 것이다. 서민 음식 중 라면 앞에 서는 것이 과연 몇이나 될까? 라면의 원조가 중국이다, 일본이다 분분하지만 그거야 어쨌든 박래품인 라면이 우리 맛의 과정을 거쳐 서민과 함께하는 보편적 음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여름 나는 시골집에 내려가 밤을 기다려 물을 반쯤 채운 냄비에 뜬 별에 라면을 넣고 끓여 먹었다. 또 낮에는 시골집 평상에 앉아 지나가는 구름 한 장을 냄비에 띄워 라면과 함께 끓여 먹었는데 냄새를 맡고 온 바람이 얼굴을 사납게 할퀴어 댔다. 그 여름 막바지 주말에는 바닷가에서 끼룩대는 갈매기 울음 서너 송이를 따 냄비에 넣고 끓여 먹다가 바다가 흰 목젖을 내밀어 오는 통에 사리 몇 가닥을 적선한 적도 있다.

몇 해 전에 나는 심야에 라면을 끓여 먹다가 사색에 잠긴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라면이 한 소식을 안겨 준 셈이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나는 신경이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서 도적처럼 몰래 주방에 갔다. 사기 그릇들이 눈을 크게 뜨고는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침묵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자극보다 반응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구석에서 곤한 잠에 든 냄비를 깨워 물을 채운 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점화를 했다.

적요의 천에 구멍을 내는, 냄비 속 물 끓는 소리가 어릴 적 들었던 한여름 밤의 개구리 울음소리 같았다(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리가 숨어 있는데, 물체 안쪽에 박혀 있는 소리들은 언제든 들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리하여 계기만 주어진다면 잽싸게 몸 밖으로 소리를 토해 놓는다).

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냈다. 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었다. 사리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해 보였다. 누구도 저들의 몸통을 부러뜨리지 않고서는 깍지 낀 결속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사리를 끓는 물 속에 넣었다. 딱딱하고 각이 져 있고, 한 몸으로 뭉쳐 있던 사리들은 펄펄 끓는 물 속에 들자마자 금세 표정을 바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는 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흩어지며 풀어지고 있었다. 저 급격한 표정 변화는 우리 시대의 슬픈 기표였다.

도마 위에 양파, 호박, 파 등속을 가지런히 놓아 두고 집 속에 든 칼을 불러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그의 눈빛은 매섭고 날카로웠다. 그는 세상을 나누고 자르기 위해 태어난 자였다. 놓여진 것들을 다 자르고도 성이 안 찬 노여운 그는 늦은 밤을 이기지 못한 내 불결한 식욕을, 지난한 허기의 관성을 푹 찔러 올는지 몰랐다. 냄비 속 부글부글 끓는 것은 그러므로 라면만은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라면 한 그릇 앞에서 자못 느낌이 무겁고 진지했다. 하지만 그해 늦은 밤 라면이 정색하고 내게 준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허기의 관성을, 라면의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한단 말인가.
2019-01-0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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