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골목을 아십니까?”
대구 도심의 약전골목을 아는 사람들은 많다.그러나 약전골목 바로 옆으로 난 ‘진골목’을 아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대구시 중구 포정동 중앙로 농협 중앙지점에서 약전골목 입구에 이르는 400m가 진골목이다.대구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어 진골목은 향수에 젖은 노인들이 즐겨 찾는 실버 골목이다.
●부자들의 동네,진골목
진골목은 ‘ㄱ’(기역)을 ‘ㅈ’(지읒)으로 잘못 발음하는 경상도 사투리의 특성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긴 골목’이란 뜻이다.
80여년 전 진골목 일대는 대구의 부자였던 달성 서씨들이 모여 사는 최고급 주택가였다.그러나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부자였던 서병국(徐炳國)이 사망하면서 진골목은 퇴락을 시작했다.
1946년 6월 대구에 호열자(콜레라)가 발생한다.그런데 첫 희생자가 당대의 부호였던 서씨여서 아직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된다.지금은 화교협회 건물로 쓰이는 서씨의 저택은 1000평이 넘는데,그 당시에 개인 풀이 있었고 보일러로 난방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서양식 건물 양식에 중국식 적벽돌을 사용해 지은 저택은 80여년이 된 건물이지만 아직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진골목의 정소아과 건물은 대구 최초의 2층 양옥집.1931년 지어진 이 건물은 서병국의 방계형제인 서병직의 소유였으나 1947년 정필수(84) 원장이 인수,지금까지 소아과 병원으로 사용하고 있다.대구가 낳은 천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1935)도 진골목에서 태어났다.진골목에 살던 만석꾼 서상민의 아들로 태어난 석재는 시인으로,서예가로,화가로, 그리고 가야금과 바둑,의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식민지시대를 풍미하며 살다 갔다.흥선대원군이 석재의 천재성에 반해 당시 17세였던 석재를 운현궁으로 초대,함께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가 전한다.시인 이육사가 한때 석재의 한약방에서 약배달을 하며 시서화를 배우기도 했다.
●실버들의 사랑방,미도다방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진골목에는 이른 아침부터 향수에 젖은 노인들이 하나둘 찾아든다.1981년 문을 연 미도다방은 하루 400∼500명의 노인들이 찾는 대구 실버들의 본거지.60∼70대 노인들은 젊은 축에 속할 정도로 80대 이상 고령자들이 수두룩하다.남산동 권입섭(101) 할아버지도 일주일에 서너차례 다방을 찾아 노익장을 과시한다.
노인들의 호주머니를 생각해서 차 한잔에 1500원,약차 2000원만 내면 과자도 주고 포도주도 한 잔씩 서비스한다.설에는 양말,보름에는 귀밝이술,동지에는 단팥죽,복날에는 수박을 돌리고 매년 5월8일에는 돼지 서너마리를 잡아 경로잔치를 열기도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경남 합천 고향가는 길에 두 번이나 이곳 다방을 찾았다.지역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들이 수시로 찾아와 노인들에게 인사를 한다.
요즘 미도다방을 찾는 노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경기 침체로 노인들도 호주머니가 얇아진 데다 조기 정년과 사업실패 등 자식들을 걱정하는 한숨소리가 다방을 가득 메운다.
주인 정인숙(52)씨는 “IMF 외환위기 전에는 하루 1000여명의 노인들이 찾아왔다.”면서 “요즘은 얇아진 호주머니 탓인지 오후 5시만 되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는 분들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정씨는 용돈이 궁한 노인들에게 공짜로 차를 대접하거나 돈을 빌려주고 단골 노인들이 세상을 뜨면 직접 문상가는 의리를 지키고 있다.
실버들의 입맛에 맞는 진골목식당도 진골목을 지키는 터줏대감.진골목식당 건물은 한때 코오롱 창업주 이원만씨가 거주했고 육개장·호박전·묵채·보리떡·콩나물밥 등이 별미다.
대구거리문화연대 권상우 사무국장은 “대구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진골목을 훼손하지 않고 문화유산으로 보존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
대구 도심의 약전골목을 아는 사람들은 많다.그러나 약전골목 바로 옆으로 난 ‘진골목’을 아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대구시 중구 포정동 중앙로 농협 중앙지점에서 약전골목 입구에 이르는 400m가 진골목이다.대구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어 진골목은 향수에 젖은 노인들이 즐겨 찾는 실버 골목이다.
●부자들의 동네,진골목
진골목은 ‘ㄱ’(기역)을 ‘ㅈ’(지읒)으로 잘못 발음하는 경상도 사투리의 특성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긴 골목’이란 뜻이다.
80여년 전 진골목 일대는 대구의 부자였던 달성 서씨들이 모여 사는 최고급 주택가였다.그러나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부자였던 서병국(徐炳國)이 사망하면서 진골목은 퇴락을 시작했다.
1946년 6월 대구에 호열자(콜레라)가 발생한다.그런데 첫 희생자가 당대의 부호였던 서씨여서 아직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된다.지금은 화교협회 건물로 쓰이는 서씨의 저택은 1000평이 넘는데,그 당시에 개인 풀이 있었고 보일러로 난방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서양식 건물 양식에 중국식 적벽돌을 사용해 지은 저택은 80여년이 된 건물이지만 아직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진골목의 정소아과 건물은 대구 최초의 2층 양옥집.1931년 지어진 이 건물은 서병국의 방계형제인 서병직의 소유였으나 1947년 정필수(84) 원장이 인수,지금까지 소아과 병원으로 사용하고 있다.대구가 낳은 천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1935)도 진골목에서 태어났다.진골목에 살던 만석꾼 서상민의 아들로 태어난 석재는 시인으로,서예가로,화가로, 그리고 가야금과 바둑,의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식민지시대를 풍미하며 살다 갔다.흥선대원군이 석재의 천재성에 반해 당시 17세였던 석재를 운현궁으로 초대,함께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가 전한다.시인 이육사가 한때 석재의 한약방에서 약배달을 하며 시서화를 배우기도 했다.
●실버들의 사랑방,미도다방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진골목에는 이른 아침부터 향수에 젖은 노인들이 하나둘 찾아든다.1981년 문을 연 미도다방은 하루 400∼500명의 노인들이 찾는 대구 실버들의 본거지.60∼70대 노인들은 젊은 축에 속할 정도로 80대 이상 고령자들이 수두룩하다.남산동 권입섭(101) 할아버지도 일주일에 서너차례 다방을 찾아 노익장을 과시한다.
노인들의 호주머니를 생각해서 차 한잔에 1500원,약차 2000원만 내면 과자도 주고 포도주도 한 잔씩 서비스한다.설에는 양말,보름에는 귀밝이술,동지에는 단팥죽,복날에는 수박을 돌리고 매년 5월8일에는 돼지 서너마리를 잡아 경로잔치를 열기도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경남 합천 고향가는 길에 두 번이나 이곳 다방을 찾았다.지역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들이 수시로 찾아와 노인들에게 인사를 한다.
요즘 미도다방을 찾는 노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경기 침체로 노인들도 호주머니가 얇아진 데다 조기 정년과 사업실패 등 자식들을 걱정하는 한숨소리가 다방을 가득 메운다.
주인 정인숙(52)씨는 “IMF 외환위기 전에는 하루 1000여명의 노인들이 찾아왔다.”면서 “요즘은 얇아진 호주머니 탓인지 오후 5시만 되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는 분들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정씨는 용돈이 궁한 노인들에게 공짜로 차를 대접하거나 돈을 빌려주고 단골 노인들이 세상을 뜨면 직접 문상가는 의리를 지키고 있다.
실버들의 입맛에 맞는 진골목식당도 진골목을 지키는 터줏대감.진골목식당 건물은 한때 코오롱 창업주 이원만씨가 거주했고 육개장·호박전·묵채·보리떡·콩나물밥 등이 별미다.
대구거리문화연대 권상우 사무국장은 “대구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진골목을 훼손하지 않고 문화유산으로 보존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
2004-03-19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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