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가 아닌 나, 다시 꿈꾸는 여성… 무대에 펼친 ‘Her’ 스토리

왕비가 아닌 나, 다시 꿈꾸는 여성… 무대에 펼친 ‘Her’ 스토리

류재민 기자
류재민 기자
입력 2023-03-21 15:28
수정 2023-03-22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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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 더 뮤지컬’의 한 장면. 아이엠컬쳐 제공
‘식스 더 뮤지컬’의 한 장면. 아이엠컬쳐 제공
“너의 사랑은 필요 없어. 내게 필요한 건 식스야.”

영국의 헨리 8세(1491~1547)의 마지막 부인 캐서린 파(1512~1548)는 이렇게 노래한다. 파뿐만 아니라 헨리 8세와 결혼했던 나머지 5명의 왕비도 사랑이 필요 없다고 하기는 마찬가지다. 약 500년이 흘러 무대 위에서 환생한 여섯 왕비는 외친다. “우리는 식스야”라고.

서울 강남구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개막한 ‘식스 더 뮤지컬’(식스)은 헨리 8세와 결혼했던 왕비들이 다시 쓰는 역사 이야기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동문인 토비 멀로와 루시 모스가 2017년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지난해 토니상 최우수 음악상과 최우수 뮤지컬 의상 디자인상을 받았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고음의 향연을 펼치는 왕비들은 이혼과 참수, 사망 등 자신들이 겪은 비극적인 사연을 두고 누가 더 불행한지 노래한다. 그러다 이들은 헨리 8세 때문에 겪은 불행으로 다투는 것보다 자신들로서 존재하는 게 더 중요함을 깨닫는다.

‘식스’는 오랫동안 수많은 작품의 전형으로 자리잡은 ‘백마 탄 왕자와의 행복한 사랑’을 산산이 깨부순다. 다 가진 그와의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남자 주인공은 무대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힘 있는 남자들의 역사(History)에 가려져 있던 여자들의 진짜 이야기(Herstory)에 관객들은 열광한다. “우리는 식스”라는 말에는 남자에 의해서가 아닌 그들 자신으로 존재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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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은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류재민 기자
‘다시, 봄’은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류재민 기자
왕자 없이 펼쳐지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식스’로만 그치지 않는다. 지난 15일 개막한 서울시뮤지컬단의 ‘다시, 봄’은 딸과 아내, 엄마의 역할 속에서 꿈을 지우고 살다 다시 시작하는 삶을 택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평균 나이 54세인 중년 여배우들의 실제 사연을 작품에 녹여 현실성을 더했다.

진숙 역을 맡은 문희경은 “한국 뮤지컬 여배우들이 설 무대가 없어서 사라진 아까운 배우들이 많은데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면서 “40~50대 배우들이 ‘저 작품 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발전하면서 좋은 콘텐츠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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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정년이’는 여성국극단을 소재로 여성 소리꾼의 꿈을 그렸다.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정년이’는 여성국극단을 소재로 여성 소리꾼의 꿈을 그렸다. 국립극장 제공
동명의 웹툰을 창극화해 오는 29일까지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국립창극단의 ‘정년이’ 역시 여성 국극단에 들어가 꿈을 이루는 목포 소녀 정년이의 이야기를 그렸다. ‘실비아 살다’(2월 11일 개막), ‘레드북’(3월 14일 개막), ‘호프’(3월 16일 개막)처럼 최근 무대에 오른 작품은 물론 지난해 개막했던 ‘리지’, ‘프리다’, ‘웨이스티드’ 등을 보면 여성 서사가 대세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런 현상의 배경으로는 주 관객층인 20~30대 여성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인터파크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공연 티켓 구매자 가운데 20대 여성이 24%, 30대 여성이 23.1%로 전체의 절반 수준에 달한다. 과거에는 여성 관객들이 멋진 남자 주인공을 갈망했다면 이제는 같은 처지의 여성 캐릭터에 공감하며 응원하는 방향으로 문화가 바뀌면서 공연계도 이에 발맞추고 있다. 단순 응원을 받는 수준을 넘어 작품성까지 갖춰 시장에서 인기 작품으로 사랑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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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 현상이 아닌 만큼 이런 흐름이 이어지리란 전망도 나온다. 뮤지컬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우리나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변화하면서 최근 3~4년 사이 여성 서사 작품이 늘어났다”며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한 인정 혹은 수용이라면 면에서 문화 콘텐츠가 현재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지금의 현상은 고무적이다. 이런 경향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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