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일제강점기 경주 월성 서편에서 수습된 돌비석 조각(비편)과 2020년 경주 월성 주변에서 수습한 비편이 사실은 하나였음이 2024년 밝혀져 학계 주목을 받았다. 서로 떨어져 있던 두 비편이 마침내 하나로 합쳐진 모습이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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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 서편에서 수습된 두 개의 비편이 하나로 합쳐진 모습. 국가유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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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 서편에서 수습된 두 개의 비편이 하나로 합쳐진 모습. 국가유산청 제공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연구소)와 국립경주박물관은 13일 경주박물관에서 ‘경주 월성 서편 수습 비편’을 특별 공개했다.
연구소가 2020년 수습한 비편(가로 16.47㎝, 세로 16.58㎝, 두께 13.67㎝, 무게 약 2.7㎏)은 경주 계림~월성 진입로 구간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됐다.
반면 경주박물관 소장 비편(가로 13.62㎝, 세로 11.13㎝, 두께 9.75㎝, 무게 약 1.23㎏)은 뒷면에 ‘소화(昭和) 일이(一二) 육(六) 이칠(二七) 서월성지(西月城址) 최(崔)’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이는 1937년 6월 27일에 서월성지에서 수습된 유물이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직원이던 최남주가 수습한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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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박물관 소장 비편 뒷면. 국가유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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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박물관 소장 비편 뒷면. 국가유산청 제공
연구소는 수습한 비편을 정밀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주박물관 소장 비편과의 관련성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두 기관이 돌의 산지를 분석한 결과, 두 비편 모두 경주 남산 알칼리 화강암으로 제작됐음이 밝혀졌다. 이후 3차원(3D) 스캔 결과물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두 비편의 한쪽 면이 서로 합쳐지는 것으로 드러나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특히 두 비편이 화제가 된 것은 신라 비석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해서(글씨를 흘려 쓰지 않고 정자로 반듯하게 쓴 글자체)가 아니라 예서(획이 복잡한 전서의 획을 간략화해 일상적으로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바꾼 서체)라는 점이다.
앞서 지난 2월 11일에는 이와 관련해 ‘월성 서편 수습 비편 전문가 포럼’이 열렸다. 당시 고구려사 연구자들은 비편의 서체가 광개토왕릉비의 것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해 비석의 건립 주체를 고구려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서로 쓰인 신라 금석문이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은 데 반해, 광개토왕릉비의 서체가 예서이며 비편에서 확실하게 판독되는 글자인 백(白), 천(天), 공(貢), 불(不), 도(渡)가 광개토왕릉비에도 확인된다는 점이 주요 근거였다.
반면 신라사 연구자들은 서체만으로 건립 주체를 확정하기에는 서체가 특정 시대나 국가 혹은 지역의 전유물로 볼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들 비편이 경주 월성에서 출토됐다는 점에서 비의 건립과 그 내용 작성 주체를 신라인들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구소는 이달 중 비편의 조사 경위와 서체 비교 자료 등을 담은 ‘경주 월성 서편 수습 비편’ 기초조사 자료집과 ‘월성 서편 수습 비편 전문가 포럼’의 단행본을 온라인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한편 이번 특별 공개는 오는 8월 17일까지 진행된다.
윤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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