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홍익대 앞 산울림소극장 3층 연습실.“글렌, 이 대사를 빼면 어떨까요?”“그건 안돼요, 숙. 극의 흐름상 아주 중요한 대사예요.”“음, 알았어요. 그럼 이 부분을 자르면 어때요?” 두사람 사이에 흐르는 약간의 긴장. 그러나 대화를 통해 금방 합의점을 찾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대본을 고친다.
연출가 글렌 월포드(왼쪽)와 배우 손숙. 연출가 글렌 월포드(왼쪽)와 배우 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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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글렌 월포드(왼쪽)와 배우 손숙.
연출가 글렌 월포드(왼쪽)와 배우 손숙.
넉넉한 웃음이 인상적인 금발의 중년 여성은 영국에서 온 연출가 글렌 월포드, 그리고 날아갈 듯 가벼운 몸매로 이리저리 동선을 연습하는 이는 중견 배우 손숙이다.17일부터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셜리 발렌타인’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모노드라마(1인극)인 탓에 연습 멤버도 단출하다. 연출가와 배우, 그리고 조연출. 셋 다 여자다.
연습 때의 진지함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인터뷰가 시작되자 두 사람은 경쟁적으로 유쾌한 입담을 풀어놓는다.1994년 국내 초연 무대에 섰던 손숙은 “꼭 한번 더 해보고 싶은 역할로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11년 만에 그 소원을 이루게 돼 기쁘다.”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절친한 친구인 극작가 윌리 러셀에게서 작품을 건네받아 영국 리버풀에서 첫 공연(1984년)을 연출했던 글렌 월포드에게도 이번 무대는 감회가 남다르다.“어떤 배우일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손)숙을 보는 순간 ‘아, 셜리구나’라는 느낌이 확 오더군요. 온화함, 유머감각, 새로움에 대한 도전의식 등이 딱 셜리를 닮았어요.”
셜리는 순종적인 아내, 헌신적인 엄마라는 ‘자동인형’같은 역할에 갇혀 집안의 벽하고나 대화를 나누는 40대 주부다. 어느 날 친구의 제안으로 감행한 ‘나홀로’ 그리스 여행에서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자신과 대면하고,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손씨는 “한때 어머니였고, 아내였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되찾는 셜리는 이 시대 여성들의 삶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주로 힘들고, 신산한 삶을 사는 여성들을 맡아온 그는 “유쾌하고 귀여운 셜리는 연기할수록 매력적인 여인”이라고 말했다. 월포드는 “부엌에 갇힌 주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스스로 어딘가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셜리를 가장 좋아하는 여인으로 꼽은 이유도 그런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연출가로, 배우로 한평생을 살아온 두 사람의 삶은 사실 평범한 주부 셜리와는 거리가 멀다. 연출가 겸 배우로 활동중인 월포드는 영국뿐만 아니라 홍콩, 일본, 러시아, 그리스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그 나라 언어로 공연하는 걸 즐긴다.“너무 바빠서 남자친구 만날 시간조차 없다.”고 농담처럼 얘기하던 그녀는 “사람이든 장소든 한 곳에 정착하는 인생은 흥미없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평범한 40대 주부의 자아찾기
오랜만에 1인극을 연습하느라 밤잠을 설친다는 손씨는 “남들처럼 쉬운 인생 놔두고 왜 이렇게 힘든 길을 가나 싶을 때도 많다.”면서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거라면 진작에 그만뒀을 것”이라고 말했다.“대사도 잘 안 외워지고, 육체적으로도 너무 힘들어 이번이 마지막 모노드라마가 될 것 같다.”는 그녀의 말을 연출가가 재빨리 가로막는다.“숙, 당신은 그러지 못해요. 산고의 고통처럼 그 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할걸요? 내가 그렇듯이 말이에요.”
손씨는 “한국어 대사도 어디가 틀렸는지 귀신같이 잡아낼 정도로 치밀하고, 섬세한 연출가”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요즘도 가끔 배우로 무대에 선다는 연출가에게 ‘좋은 배우, 좋은 연출가’의 조건을 물었다.“참을성, 용기, 유머감각.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절대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 7월17일까지.(02)334-5915.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2005-05-1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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