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제재 해제> 서방의 이란 제재 역사…1979년부터 37년간 ‘압박’

<이란 제재 해제> 서방의 이란 제재 역사…1979년부터 37년간 ‘압박’

입력 2016-01-17 11:45
수정 2016-01-1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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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시작해 2005년 핵개발로 ‘분수령’미국·EU·유엔 ‘3중 고강도 제재’가 결정타

16일(현지시간)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란의 핵합의 이행을 확인하면서 지난 37년간 중동의 대국이자 자원 부국인 이란을 압박해온 서방과 유엔의 대(對)이란 경제·금융 제재의 족쇄가 풀리게 됐다.

1950년대 초반 미국과 영국이 한때 이란에 경제 제재를 취했던 적이 있지만 본격적인 서방의 제재가 가해진 계기는 1979년 이슬람 혁명이었다.

당시 혁명으로 축출된 팔레비 왕조의 모하마드 레자 샤(왕)가 미국으로 망명하자 이에 반발한 이란 대학생들은 그 해 11월4일 주 테헤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했다.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에 대응해 같은 달 행정명령 12170호를 발령, 이란의 미국 내 자산 120억달러를 동결했다. 이 조치는 이후 37년간 이어진 대 이란 경제 제재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이후 1980∼1990년대 중동지역 주요 사안에서 이란과 부딪힐 때마다 일련의 추가 제재로 압력을 가했다.

이란-이라크 8년 전쟁 도중인 1984년 1월 이란을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고 이란제재법(ISA)을 만들어 이란에 대한 무기 수출을 금하고 외국 은행이 이란에 대출해주지 못하게 했다.

1995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일련의 행정명령으로 이란과의 모든 무역거래를 사실상 중단했고, 이듬해에는 미국 의회에서 이란과 리비아의 원유와 가스개발 사업에 외국의 투자를 봉쇄하는 이란·리비아 제재법(ILSA)을 제정했다.

이란에 대한 제재 수위가 한층 높아진 것은 2005년 반(反) 서방 보수파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핵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부터다.

이에 미국은 2006년 ILSA를 이란제재법(ISA)으로 개편하면서 제재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또 이란 국영은행과 미국 금융기관과의 거래를 금지하고, 2007년에는 이란군의 핵심 정예인 혁명수비대를 테러지원단체로 지정해 관련 인물과 기관의 금융거래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자산을 동결하는 강수를 뒀다.

이런 기조는 2010년 ISA를 강화한 ‘포괄적 이란 제재법’(CISADA) 발효 등으로 이어진다.

유엔 차원의 제재가 시작된 것도 이 시기다.

유엔 안보리는 2006년 12월 우라늄 농축활동 중단을 촉구하면서 이란원자력청 등 10개 기관의 자산을 동결한 1차 제재 결의안을 채택한 이후 2015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이란 핵개발과 관련한 제재를 결의했다.

특히 2010년 6월의 1929호 결의는 모든 이란 은행의 거래를 감시하도록 하고 탄도미사일 관련 기술 지원을 금지했으며 제재 대상 기관과 인물도 대폭 확대했다.

여기에 유럽연합(EU)도 2010년 유엔 제재와 별도로 이란의 금융과 수송 규제, 에너지 분야 신규투자 금지 등을 골자로 한 제재안을 채택했다.

미국과 EU 등 서방의 대 이란 제재는 2011년 11월 IAEA가 이란의 핵무기 개발 작업 의심 보고서를 공개한 뒤 또 한차례 강화돼 이란 경제에 결정타를 안긴다.

미국은 2012년 1월 이란 중앙은행과 거래하는 모든 경제주체에 대해 미국 금융기관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국방수권법’(NDAA) 등 일련의 고강도 제재로 이란 석유에 대한 사실상의 국제적인 금수조치를 내렸다.

EU 역시 이란 중앙은행 자산 동결과 이란산 석유 금수 등으로 제재 수위를 높였다.

미국에 EU, 유엔이 가세안 ‘3중 제재’로 이란은 원유 수출이 반토막이 나면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물가상승률은 치솟는 등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은 2013년 8월 대선에서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민생을 살리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하산 로하니의 승리로 이어졌다.

중도 성향의 로하니 행정부가 들어선 것을 계기로 이란은 2013년 10월 제네바에서 주요 6개국(P5+1)과의 첫 협상에 나섰고 양측은 약 2년 뒤인 2015년 7월14일 역사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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