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용후기’라는 책 표지에는 “고집스럽게 대한민국을 사랑하시는 분들은 절대로 이 책을 읽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다. 당신은 서문에서 “한국을 무지하게 사랑”했지만,“결국 이 나라가 미치도록 미워졌다.”고 밝혔다. 사랑이 왜 증오로 변했나?
당신의 표현대로 대한민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필요에 맞게 소비해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홍대 앞에서 당신이 “놀지 않은 지 한 2년” 되었다. 이유는 “미국의 어느 빈민촌 흑인 양아치인 줄로 착각하는 강남의 중산층 남자애들”과 “걸레 같은 한국 여자애들” 등 “그 동네 거의 모든 것을 증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년 전에는 어땠나.1996부터 10년 동안 홍대 앞을 잘 사용했을 것이다. 잘 ‘놀’았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인종차별주의자(racist)가 아니라 문화차별주의자(culturalist)”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흰둥이’라며 비하하는 척한다. 한국인이 사용하지도 않는 ‘흰둥이’라는 표현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백인의 자신감과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의식을 드러낸다. 이 ‘흰둥이’ 전략은 문화차별에도 적용된다.‘개판’인 미국의 대통령을 흉본 뒤, 한국의 대통령을 부시의 “잘 훈련된 푸들”이라며 더 격하한다.“작은 미국이 되려고 용쓰는 한국”을 비판하면서 부지불식간 큰 미국을 암시한다.
백인과 미국인의 우월주의를 열등한 척 뒤집어 다른 나라의 문화를 더 차별하거나 더 열등하게 몰고 간다. 비주류를 가장한 주류의 관점이다.
당신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뜻을 구별해주면서, 한국에는 ‘천박한 민족주의’가 난무한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꼭뒤를 비춘 일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라크에 군사를 파병해 달라.”는 요청을 한 조지 부시 대통령보다 그 요청을 받아들인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의 표적으로 삼은 당신은 애국주의자인가 민족주의자인가. 천박한 민족주의 때문에 한국인이 “오로지 상업적 이익을 위해 상품을 파는 데 독도를 사용한다.”고 했는데, 당신이야말로 독도를 포함한 대한민국 전체를 사용해서 상업적 이익을 얻고 있지 않은가. 얼핏 보면 당신의 독설은 새로운 문화적 시각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그 본질은 “일본과 미국은 남한의 3대 교역국에 포함되며, 남한의 지속적인 번영과 복지에 반드시 필요한 나라”이니 “그냥 어울려 지내”라는 것이다. 당신이 주장하는 ‘세계화’의 단면이다.
당신은 “한국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사람들”로 천박한, 잘난 척, 술 취한, 차별하는, 멍청한 놈을 간추려 놓았다. 당신이 정의한 의미와는 다르지만 그 단어들이 당신에게도 전부 적용된다. 당신의 어휘는 똥꼬, 개판, 고자, 쓰레기, 걸레 등 의도적으로 천박하고,‘인정 많은 한국인’에 대한 메이어의 의견을 뭉개며 잘난 척하고, 술 취한 듯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대신 함부로 문화를 차별하고, 미국과 백인을 모독하는 척하면서 그들과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를 문화비평의 잣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한국에서 사라지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충분히 대한한국을 사용하고 나면, 홍대 앞을 떠나듯, 당신 스스로 한국을 떠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작가라는 직업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작가라는 당신이 지나간 자리마다 왜 그다지도 ‘증오’와 ‘똥’과 ‘걸레’가 수북한가. 이는 작가의 눈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흡수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문화의 향기를 재생산하는 대신, 소비자의 눈으로 먹고 배설하고 소비해버렸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당신이 비주류의 관점을 가졌다면, 문화의 차별이 아닌 차이를 통해, 그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홍대 앞에서 오랫동안 살아 온 나도, 같은 작가로서, 당신이 쓸 다음 책을 기대했을 것이다.
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당신의 표현대로 대한민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필요에 맞게 소비해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홍대 앞에서 당신이 “놀지 않은 지 한 2년” 되었다. 이유는 “미국의 어느 빈민촌 흑인 양아치인 줄로 착각하는 강남의 중산층 남자애들”과 “걸레 같은 한국 여자애들” 등 “그 동네 거의 모든 것을 증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년 전에는 어땠나.1996부터 10년 동안 홍대 앞을 잘 사용했을 것이다. 잘 ‘놀’았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인종차별주의자(racist)가 아니라 문화차별주의자(culturalist)”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흰둥이’라며 비하하는 척한다. 한국인이 사용하지도 않는 ‘흰둥이’라는 표현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백인의 자신감과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의식을 드러낸다. 이 ‘흰둥이’ 전략은 문화차별에도 적용된다.‘개판’인 미국의 대통령을 흉본 뒤, 한국의 대통령을 부시의 “잘 훈련된 푸들”이라며 더 격하한다.“작은 미국이 되려고 용쓰는 한국”을 비판하면서 부지불식간 큰 미국을 암시한다.
백인과 미국인의 우월주의를 열등한 척 뒤집어 다른 나라의 문화를 더 차별하거나 더 열등하게 몰고 간다. 비주류를 가장한 주류의 관점이다.
당신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뜻을 구별해주면서, 한국에는 ‘천박한 민족주의’가 난무한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꼭뒤를 비춘 일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라크에 군사를 파병해 달라.”는 요청을 한 조지 부시 대통령보다 그 요청을 받아들인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의 표적으로 삼은 당신은 애국주의자인가 민족주의자인가. 천박한 민족주의 때문에 한국인이 “오로지 상업적 이익을 위해 상품을 파는 데 독도를 사용한다.”고 했는데, 당신이야말로 독도를 포함한 대한민국 전체를 사용해서 상업적 이익을 얻고 있지 않은가. 얼핏 보면 당신의 독설은 새로운 문화적 시각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그 본질은 “일본과 미국은 남한의 3대 교역국에 포함되며, 남한의 지속적인 번영과 복지에 반드시 필요한 나라”이니 “그냥 어울려 지내”라는 것이다. 당신이 주장하는 ‘세계화’의 단면이다.
당신은 “한국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사람들”로 천박한, 잘난 척, 술 취한, 차별하는, 멍청한 놈을 간추려 놓았다. 당신이 정의한 의미와는 다르지만 그 단어들이 당신에게도 전부 적용된다. 당신의 어휘는 똥꼬, 개판, 고자, 쓰레기, 걸레 등 의도적으로 천박하고,‘인정 많은 한국인’에 대한 메이어의 의견을 뭉개며 잘난 척하고, 술 취한 듯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대신 함부로 문화를 차별하고, 미국과 백인을 모독하는 척하면서 그들과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를 문화비평의 잣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한국에서 사라지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충분히 대한한국을 사용하고 나면, 홍대 앞을 떠나듯, 당신 스스로 한국을 떠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작가라는 직업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작가라는 당신이 지나간 자리마다 왜 그다지도 ‘증오’와 ‘똥’과 ‘걸레’가 수북한가. 이는 작가의 눈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흡수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문화의 향기를 재생산하는 대신, 소비자의 눈으로 먹고 배설하고 소비해버렸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당신이 비주류의 관점을 가졌다면, 문화의 차별이 아닌 차이를 통해, 그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홍대 앞에서 오랫동안 살아 온 나도, 같은 작가로서, 당신이 쓸 다음 책을 기대했을 것이다.
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2007-05-2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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