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통합이냐 뉴라이트냐. 최근 출범한 초교파 기독교 비정부기구(NGO) ‘기독교사회책임’이 여전히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다. 기독교사회책임의 고문을 맡고 있는 김진홍 두레교회 목사는 기독교사회책임의 성격을 스스로 뉴라이트(신우파)라고 규정했다. 반면 이 기구의 공동대표인 서경석 조선족교회 목사는 기독교사회책임의 노선은 뉴라이트가 아니라 중도통합이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기독교사회책임을 이끄는 인사들은 그들의 ‘전력’과 상관없이 일단 중도통합을 내세우는 분위기다.
이와 관련,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인 박득훈 언덕교회 담임목사는 최근 한 포럼에서 “기독교사회책임은 그동안 존경과 신망을 받아온 교계 명망가들과 비교적 젊은 세대가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 한기총과 다르지만 주축은 역시 한국 보수교회”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기독교사회책임을 바라보는 제3자의 시각은 대체로 그런 것이 아닐까.
뉴라이트라는 말 자체는 문제가 될 게 없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하고, 진보와 보수 양 극단이 아닌 ‘새로운’ 보수를 추구한다는데 누가 쉽게 이의를 달겠는가. 하지만 사정은 꼭 그렇지 않다. 뉴라이트 운동권은 현 정권과 사회를 좌파·좌편향으로 단정한다. 뉴라이트 운동의 한 축인 ‘자유주의연대’의 신지호 대표는 “우리는 올드 라이트보다 올드 레프트와의 싸움에 주력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정치집단으로서의 이념과 지향을 분명히 한 것이다. 기독교사회책임쪽 사람들의 ‘뉴라이트 알레르기’ 반응이 이같은 정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는, 근묵자흑(近墨者黑) 차원의 것이라면 그리 탓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뉴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중도통합 또한 기독교 NGO운동에 어울리는 간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지난 시절 중도통합이 결국 군사독재를 합리화하는 ‘사이비 통합’으로 전락했던 경험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것은 회색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말이 좋아 중도이고 통합이지 뉴라이트 못지않게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또 이용당하기 쉬운 게 중도통합론이다. 진정한 통합이란 좌·우 이념의 가운데를 걷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사회책임이 굳이 집단의 목소리를 빌려 사회운동에 나서겠다면 기독교적 양심으로 돌아가 무엇이 선(善)이고 공의(公義)인지 가려내, 진실의 편에서 거짓을 매섭게 비판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지난 100여년 동안 유례없는 양적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에 걸맞는 사회적 책임과 사명을 다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 몇몇 대형 교회의 설교장은 정치판을 방불케 한다. 핏발선 색깔론이 난무하고 수구 냉전의 시국성토로 얼룩져 있다. 잇단 대규모 구국기도회나 통곡기도회는 한국 교회의 정치세력화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출발한 기독교사회책임이 과연 사회를 향해 얼마나 설득력 있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기독교사회책임은 현 시국에 대한 위기의식뿐 아니라, 교회의 복음전파와 사회참여는 기독교인의 의무라는 1974년 스위스 ‘로잔언약’에서 결성의 당위성을 찾는다.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박차고 벌판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반성하고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 세습과 물신숭배 등 영적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간 일치와 연합을 이뤄내는 일이 급선무다. 뉴라이트니 중도통합이니 하는 논쟁은 한가한 것이다. 무익하기까지 하다.
요컨대 기독교사회책임이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것은 중도통합이 아니라 ‘탈정치화’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다면 세상이 교회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는 어느 목회자의 자조섞인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김종면 문화부 차장 jmkim@seoul.co.kr
이와 관련,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인 박득훈 언덕교회 담임목사는 최근 한 포럼에서 “기독교사회책임은 그동안 존경과 신망을 받아온 교계 명망가들과 비교적 젊은 세대가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 한기총과 다르지만 주축은 역시 한국 보수교회”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기독교사회책임을 바라보는 제3자의 시각은 대체로 그런 것이 아닐까.
뉴라이트라는 말 자체는 문제가 될 게 없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하고, 진보와 보수 양 극단이 아닌 ‘새로운’ 보수를 추구한다는데 누가 쉽게 이의를 달겠는가. 하지만 사정은 꼭 그렇지 않다. 뉴라이트 운동권은 현 정권과 사회를 좌파·좌편향으로 단정한다. 뉴라이트 운동의 한 축인 ‘자유주의연대’의 신지호 대표는 “우리는 올드 라이트보다 올드 레프트와의 싸움에 주력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정치집단으로서의 이념과 지향을 분명히 한 것이다. 기독교사회책임쪽 사람들의 ‘뉴라이트 알레르기’ 반응이 이같은 정치화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는, 근묵자흑(近墨者黑) 차원의 것이라면 그리 탓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뉴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중도통합 또한 기독교 NGO운동에 어울리는 간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지난 시절 중도통합이 결국 군사독재를 합리화하는 ‘사이비 통합’으로 전락했던 경험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것은 회색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말이 좋아 중도이고 통합이지 뉴라이트 못지않게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또 이용당하기 쉬운 게 중도통합론이다. 진정한 통합이란 좌·우 이념의 가운데를 걷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사회책임이 굳이 집단의 목소리를 빌려 사회운동에 나서겠다면 기독교적 양심으로 돌아가 무엇이 선(善)이고 공의(公義)인지 가려내, 진실의 편에서 거짓을 매섭게 비판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지난 100여년 동안 유례없는 양적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에 걸맞는 사회적 책임과 사명을 다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 몇몇 대형 교회의 설교장은 정치판을 방불케 한다. 핏발선 색깔론이 난무하고 수구 냉전의 시국성토로 얼룩져 있다. 잇단 대규모 구국기도회나 통곡기도회는 한국 교회의 정치세력화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출발한 기독교사회책임이 과연 사회를 향해 얼마나 설득력 있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기독교사회책임은 현 시국에 대한 위기의식뿐 아니라, 교회의 복음전파와 사회참여는 기독교인의 의무라는 1974년 스위스 ‘로잔언약’에서 결성의 당위성을 찾는다.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박차고 벌판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반성하고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 세습과 물신숭배 등 영적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간 일치와 연합을 이뤄내는 일이 급선무다. 뉴라이트니 중도통합이니 하는 논쟁은 한가한 것이다. 무익하기까지 하다.
요컨대 기독교사회책임이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것은 중도통합이 아니라 ‘탈정치화’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다면 세상이 교회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는 어느 목회자의 자조섞인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김종면 문화부 차장 jmkim@seoul.co.kr
2004-12-22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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