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황석영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인 ‘탑’(塔)에서 조그만 불탑(佛塔)을 중심으로 전쟁의 허무와 교조주의의 무모함을 생생하게 그렸다.“탑은 어느 편의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을 지키는 자들의 철저한 승리를 의미하는 상징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이런 탑을 위해 적군인 놈들과 아군인 우리는 전투를 벌인다.“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문 상병은…가슴속에 손가락을 잘라 넣고, 바람이 좁은 구멍을 빠져나가는 듯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그는 두어번 연약하게 기침을 했는데 그때마다 피가 입으로 솟아올랐다.”문 상병은 죽고, 하사와 소총수도 죽으며, 우리는 ‘작전명령에 따라’ 그 탑을 지켜낸다. 물론 “우리가 싸워서 지켜낸 것은 돌덩이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을 믿는다. 다른 임무를 위해 시체와 장비를 싣고 그곳을 떠날 때 캠프와 토치카를 짓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지킨 탑이 불도저에 의해 맥없이 무너져 버리는 것을 본다.
지난해 12월 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통과시킨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자기들이 쌓아올린 탑이 온 나라를 말의 싸움질로 뒤흔들며 무너져 내렸는데도 아무런 반성이 없다. 그들은 그 탑으로 서울 중심의 편향발전이 해소되고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조적이었던 그 믿음이 위헌 결정으로 무산되었다면 우선 그 야단법석의 레토릭에 대해 고해성사나 석고대죄라도 해야 했다. 문 상병처럼 고통스러운 국민에게 고작 하는 짓이라곤 내 탓이 아닌 네 탓이라는 고질병의 되풀이다. 그 탑의 조성과 진행에서 정책보다 정략이 우선했음을 고백하는 진솔한 사과가 없다. 부서진 탑의 잔해를 정녕 보기 부끄럽다면 실사구시적인 건전한 대안을 모색해야지 원상복구나 원천무효의 당리당략, 궤변으로 상대방 죽이기에 나서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다수 국민을 두번 죽이는 일이다.
‘국민으로부터 어떤 권한도 직접 위임받지 않은 기관이 헌법을 파괴했다.’ ‘기득권과 보수의 핵심이며, 갑신칠적(甲申七賊)인 헌법재판관들을 탄핵해야 한다.’는 쪽의 궤변은 우리가 권위를 부여한 국가기관을 부정하는 저주의 레토릭이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아전인수 레토릭의 극치다.‘헌재의 판결은 서울 시민만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승리다.’ ‘국가의 명운이 결딴날 뻔한 수도이전이 백지화되어 천만다행’이라는 또 다른 쪽의 궤변은 왜곡과 허위의 레토릭이며, 기회주의적 눈치보기 레토릭의 극치다. 이런 소피스트적인 레토릭에서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발전을 위한 토론과 합의는 불가능하다.
소피스트들은 말로써 사익을 얻으려고 아테네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선생이라는 좋은 뜻을 가졌지만 진실한 내용보다는 번지르르한 말의 기교를 가르치고, 자기이익을 위한 레토릭을 전파했다. 당연히 폐해가 컸다. 이에 플라톤은 ‘레토릭은 말이나 글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설득하여 건전한 사회생활을 이끌어나가게 하는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설득의 수단과 과정을 발견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들은 교육을 통해 소피스트의 폐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에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그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의 역사에 크나큰 공헌을 한 것이다.
건전한 사회적 합의과정을 위해 정치인들은 교조적인 집단 레토릭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조적인 레토릭은 신이 인간을 지배한 중세 암흑시대의 특징이었다. 인간에 봉사하는 레토릭이 아니라 종교와 교직자를 미화하기 위한 레토릭이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믿음과 다르면 이단으로 모는 레토릭은 더 이상 설득과 토론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녀사냥식 전투에 몰입할 뿐이다.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갈등이 아니라 통합을 지향하는 레토릭을 형성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러자면 소피스트적 레토릭의 관행을 떨쳐내야 한다. 정객(politician)의 레토릭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적 합의를 위해 설득과 토론에 전력투구하는 정치가(statesman)의 레토릭으로 돌아와야 한다.
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 교수
지난해 12월 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통과시킨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자기들이 쌓아올린 탑이 온 나라를 말의 싸움질로 뒤흔들며 무너져 내렸는데도 아무런 반성이 없다. 그들은 그 탑으로 서울 중심의 편향발전이 해소되고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조적이었던 그 믿음이 위헌 결정으로 무산되었다면 우선 그 야단법석의 레토릭에 대해 고해성사나 석고대죄라도 해야 했다. 문 상병처럼 고통스러운 국민에게 고작 하는 짓이라곤 내 탓이 아닌 네 탓이라는 고질병의 되풀이다. 그 탑의 조성과 진행에서 정책보다 정략이 우선했음을 고백하는 진솔한 사과가 없다. 부서진 탑의 잔해를 정녕 보기 부끄럽다면 실사구시적인 건전한 대안을 모색해야지 원상복구나 원천무효의 당리당략, 궤변으로 상대방 죽이기에 나서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다수 국민을 두번 죽이는 일이다.
‘국민으로부터 어떤 권한도 직접 위임받지 않은 기관이 헌법을 파괴했다.’ ‘기득권과 보수의 핵심이며, 갑신칠적(甲申七賊)인 헌법재판관들을 탄핵해야 한다.’는 쪽의 궤변은 우리가 권위를 부여한 국가기관을 부정하는 저주의 레토릭이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아전인수 레토릭의 극치다.‘헌재의 판결은 서울 시민만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승리다.’ ‘국가의 명운이 결딴날 뻔한 수도이전이 백지화되어 천만다행’이라는 또 다른 쪽의 궤변은 왜곡과 허위의 레토릭이며, 기회주의적 눈치보기 레토릭의 극치다. 이런 소피스트적인 레토릭에서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발전을 위한 토론과 합의는 불가능하다.
소피스트들은 말로써 사익을 얻으려고 아테네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선생이라는 좋은 뜻을 가졌지만 진실한 내용보다는 번지르르한 말의 기교를 가르치고, 자기이익을 위한 레토릭을 전파했다. 당연히 폐해가 컸다. 이에 플라톤은 ‘레토릭은 말이나 글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설득하여 건전한 사회생활을 이끌어나가게 하는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설득의 수단과 과정을 발견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들은 교육을 통해 소피스트의 폐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에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그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의 역사에 크나큰 공헌을 한 것이다.
건전한 사회적 합의과정을 위해 정치인들은 교조적인 집단 레토릭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조적인 레토릭은 신이 인간을 지배한 중세 암흑시대의 특징이었다. 인간에 봉사하는 레토릭이 아니라 종교와 교직자를 미화하기 위한 레토릭이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믿음과 다르면 이단으로 모는 레토릭은 더 이상 설득과 토론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녀사냥식 전투에 몰입할 뿐이다.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갈등이 아니라 통합을 지향하는 레토릭을 형성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러자면 소피스트적 레토릭의 관행을 떨쳐내야 한다. 정객(politician)의 레토릭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적 합의를 위해 설득과 토론에 전력투구하는 정치가(statesman)의 레토릭으로 돌아와야 한다.
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 교수
2004-11-02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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