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의 소설 ‘완장’은 권력의 허황함에 빠져드는 인간의 나약한 과시욕을 풍자한 작품이다.땅투기로 떼돈을 번 졸부의 눈에 들어 저수지 감시원 완장을 얻어 차고 거들먹거리는 주인공과,그를 손가락질하는 동네주민들의 관계는 바로 희화화된 우리 인생의 자화상이다.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일부 언론을 ‘완장문화’로 지칭하고 이들과의 전의를 드러낸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또 한바탕 소동이다.
노 대통령의 발언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당선자 시절부터 되풀이해온 ‘조폭언론’운운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발언이라 미루어 짐작은 간다.노 대통령은 나아가 자신이 지금 “완장문화에 도전하고 있으며,군림문화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행정수도에 반대하는 언론들을 가리켜 “정부청사 가까운 곳에 거대 빌딩을 가진 신문사들”로 규정한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완장은 권력의 하수인들이나 차는 것이다.나치 치하 유럽국가들에서는 나치 완장을 찬 부역자들이 있었고,아프리카에서 백인 노예상들을 도와 노예사냥에 나선 것도 완장 찬 흑인들이었다.우리는 6·25전쟁통에 붉은 완장 찬 머슴들이 주인가족을 처형하고,한편에선 완장 찬 보도연맹원들이 좌익인사들을 쥐잡듯 했던 모습을 보았다.우리 역사에서 완장은 무상한 권력에 기생하는 인간의 순응주의를 상징한다.
설마 노 대통령이 이런 부정적 어의를 알면서 완장언론이라는 말을 쓴 것은 아니었으리라.노 대통령은 거대 언론은 권력이고 자신은 그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공격당하는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분류에 줄곧 집착해왔다.그 언론권력을 조폭언론이라 부르다,이번에는 완장문화로 새롭게 지칭한 셈이다.완장이 권력이라면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된 우리 체제에서 제일 큰 완장 찬 사람은 대통령이다.그밖에 완장 찬 세력을 굳이 꼽자면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와 정부,친여 인터넷 매체,방송,노동계,법조 등에 포진한 친여 인사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언론은,왜 지금처럼 개혁대상이 됐는지 스스로 쉼없이 자문하고 반성해야 한다.하지만 백보를 양보해도,대통령이 언론을 완장문화로 부른 것은 부적절했다.대통령도 비판 없는 언론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언론의 권력비판은 소설 ‘완장’의 주인공처럼 손바닥만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그것이 언론의 사명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기동 논설위원 yeekd@seoul.co.kr
노 대통령의 발언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당선자 시절부터 되풀이해온 ‘조폭언론’운운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발언이라 미루어 짐작은 간다.노 대통령은 나아가 자신이 지금 “완장문화에 도전하고 있으며,군림문화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행정수도에 반대하는 언론들을 가리켜 “정부청사 가까운 곳에 거대 빌딩을 가진 신문사들”로 규정한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완장은 권력의 하수인들이나 차는 것이다.나치 치하 유럽국가들에서는 나치 완장을 찬 부역자들이 있었고,아프리카에서 백인 노예상들을 도와 노예사냥에 나선 것도 완장 찬 흑인들이었다.우리는 6·25전쟁통에 붉은 완장 찬 머슴들이 주인가족을 처형하고,한편에선 완장 찬 보도연맹원들이 좌익인사들을 쥐잡듯 했던 모습을 보았다.우리 역사에서 완장은 무상한 권력에 기생하는 인간의 순응주의를 상징한다.
설마 노 대통령이 이런 부정적 어의를 알면서 완장언론이라는 말을 쓴 것은 아니었으리라.노 대통령은 거대 언론은 권력이고 자신은 그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공격당하는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분류에 줄곧 집착해왔다.그 언론권력을 조폭언론이라 부르다,이번에는 완장문화로 새롭게 지칭한 셈이다.완장이 권력이라면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된 우리 체제에서 제일 큰 완장 찬 사람은 대통령이다.그밖에 완장 찬 세력을 굳이 꼽자면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와 정부,친여 인터넷 매체,방송,노동계,법조 등에 포진한 친여 인사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언론은,왜 지금처럼 개혁대상이 됐는지 스스로 쉼없이 자문하고 반성해야 한다.하지만 백보를 양보해도,대통령이 언론을 완장문화로 부른 것은 부적절했다.대통령도 비판 없는 언론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언론의 권력비판은 소설 ‘완장’의 주인공처럼 손바닥만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그것이 언론의 사명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기동 논설위원 yeekd@seoul.co.kr
2004-08-1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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