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신분과 풍습을 초월하여 인간에 대한 휴머니즘으로 가득찬 이퇴계가 두향이가 한갓 미천한 기생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그녀를 길가는 사람 보듯 하지 않았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퇴계와 두향의 로맨스는 과장된 헛소문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그때였다.
짧은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군청에 전화를 걸었던 선원이 내게 다가와 말하였다.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였다.
“선생님을 모시고 두향의 무덤까지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선착장에는 비상용으로 작은 쾌속정 한 대가 구비되어 있었다. 배를 타기 전 나는 매점에서 간단하게 소주 한 병과 술을 따를 종이컵, 그리고 간단한 안줏감을 사 들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배에 올라타시지요.”
배에 올라타자 사내는 배가 요동치지 말라고 묶어둔 밧줄을 풀었다. 어느 정도 배가 선착장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려 발동을 걸었다. 이내 투투타타― 하는 엔진소리가 터지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배가 출발하였다. 배는 빠른 속도로 사선을 따라서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물의 수면을 떠올라 빠르게 전진하고 있었으므로 물보라가 일었다. 봄이었지만 호수 주위는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으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었다.
“두향의 무덤 앞에는 원래 커다란 바위가 있었습니다. 강선대라고 불리던 바위지요.”
강선대(降仙臺)라면 문자 그대로 선녀들이 내려와 노닐던 바위라는 뜻이 아닐 것인가.
“수몰되기 전에는 어른이 수십명 앉아 놀 수 있을 만큼 넓고 큰 바위가 그대로 보였지요. 그러나 지금은 물에 잠겨 볼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겨울가뭄 때문에 수량이 많지 않아 바위가 드러나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이퇴계 선생과 기생 두향이가 주로 이 강선대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노닐었다고 합니다.”
사내는 엔진소리를 이기기 위해서 소리를 높여 내게 말하였다.
“따라서 두향의 무덤은 원래 강선대 바로 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충주댐으로 인공호수가 생기자 물에 잠길 것을 마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산 중턱으로 이장하였다고 하지요. 만약 이장하지 않았다면 수중무덤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어찌하여 나를 낳은 조국의 산야는 이처럼 금수강산인가. 누더기와 같은 역사와 넝마와 같은 혼란 속에서도 조국의 강산은 어찌하여 이토록 절세(絶世)인가.
순간 내 머릿속으로 이곳을 찾아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던 추사 김정희의 시가 한 수 떠올랐다.
“명필의 붓처럼 천둥번개에 몰아치듯 뛰어난 운치, 그윽한 정, 먼 물가에 흩어졌구나.
천리 밖에 한 조각 돌 주워가지고
책상 위에 놓으면 이 봉우리는 언제고 푸르리.”
추사의 시는 정확하다. 이 절경의 모습은 천둥번개를 몰아치듯 뛰어난 운치로 창조주가 붓을 움직여 그린 신필(神筆)인 것이다.
2005-02-23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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