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197㎝,몸무게 90㎏
·1979년 대전 출생
·1988년 대전 유성초 3학년 때 배구 시작
·1997년 대전 중앙고 3학년 때 전국대회 3연패
·1998년 한양대 입학,국가대표 발탁,대학부 64연승 달성
·2001년 슈퍼리그 대학부 우승
·2002년 1월 LG화재 입단 계약 ,자유계약 파동
·2003년 9월 법원 화해조정으로 LG화재 입단
돌고래처럼 솟구쳐 올라 상대의 블로킹 위에서 내리꽂는 스파이크의 위력은 변함이 없었다.빙그레 웃는 천진난만한 얼굴도 그대로였다.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자유계약을 맺어 배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뒤 2년 동안 ‘코트의 미아’로 떠돌던 이경수가 돌아왔다.지루한 법정 다툼을 마감하고 LG화재 선수로 인정받은 그는 지난 16일 끝난 전국체전에서 경북대표로 출전,특유의 고공강타를 뽐내며 화려한 부활을 예고했다.
그는 오는 21일부터 동해에서 열리는 실업배구대제전에서 최고 거포의 위상을 되찾겠다고 벼른다.이 대회에서 LG가 결승 토너먼트에 오르면 무적 삼성화재와 맞붙게 돼 그는 김세진과 자존심을 건 정면승부를 벌인다.●올겨울 ‘속죄’ 스파이크 날린다
17일 경기도 이천의 LG인화원 숙소에서 만난 이경수는 말을 아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팀이나 배구계,무엇보다 팬들에게 끼친 심려를 멋진 경기로 날려 드릴 것입니다.”
짤막하게 말을 마치고 ‘속죄의 마음’을 실은 강스파이크를 연신 터뜨릴 뿐이었다.
배구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이경수 파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별로 없다.10년 만에 나올까 말까 한 거포 잡기에 혈안이 됐던 구단들은 드래프트를 지킬 생각이 별로 없었고,배구협회는 드래프트와 자유계약 사이에서 갈지자 행보를 거듭했다.대학들도 드래프트 때문에 선수 몸값이 떨어진다며 아우성 쳤다.
그러나 그는 “가장 큰 책임은 내게 있다.”고 말했다.어쨌든 드래프트를 어긴 당사자는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배구가 팬들의 외면을 받게 된 데 대한 책임도 느낀다고 말했다.하지만 “간절하게 LG에 가고 싶어했던 내 마음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지난 과오를 알기에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 지도 잘 안다.배구가 재미없어진 이유가 삼성의 독주 때문이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우승팀이 뻔한데 왜 뛰냐.”는 냉소주의가 팽배해 삼성과 붙으면 경기를 포기하기 일쑤였다.그는 “우선 삼성을 넘고 싶다.”고 말했다.맞는 말이다.삼성의 ‘갈색폭격기’ 신진식과 ‘라이트 지존’ 김세진이 강타를 터뜨리면 이경수의 칼날같은 스파이크도 터져야 흥미로워진다.그러나 혼자 잘한다고 삼성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LG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삼성의 조직력을 무너뜨리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LG 노진수 감독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은 틀림없지만 조직력은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면서 “경수가 얼마나 빨리 적응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시속 115㎞ 녹슬지 않은 스파이크
공백 기간에도 국가대표로 활동한 덕택에 기량은 녹슬지 않았다.최고시속 115㎞를 넘나드는 스파이크 서브,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노련한 틀어때리기,높이와 각도를 이용해 상대 블로킹을 따돌리는 고공강타는 그가 왜 ‘제2의 강만수’로 불리는가를 알게 해준다.
그의 강스파이크를 받아내느라 팔목이 빨갛게 부어오른 강호인 코치는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가 온몸의 힘을 이용해 스윙을 하듯이 경수도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힘을 손목에 모을 줄 안다.”면서 “천부적인 파괴력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불같은 승부욕도 그의 강점이다.평소에는 소극적이지만 일단 코트에 들어서면 공중에 떠있는 공을 때리지 않고는 참지 못한다.집앞까지 따라다니던 소녀팬들을 다시 불러모을 자신이 있다는 이경수.그가 펄펄 날 올 겨울 배구슈퍼리그(V투어)가 기다려진다.
글 이창구기자 window2@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
■‘이경수 파동' 전말
‘이경수 파동’의 핵심인 드래프트제도는 지난 1999년 도입됐다.이전 자유계약하에서 삼성화재가 김세진 신진식 등 알짜들을 싹쓸이하자 대한배구협회는 3년간 한시적 드래프트를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2001년 10월 LG화재가 드래프트 거부를 선언했다.96년 김세진과 먼저 계약했지만 삼성의 창단으로 눈물을 삼킨 LG는 “팀 해체도 불사하겠다.”고 맞섰다.이경수의 한양대 시절 은사였던 송만덕 감독이 이끄는 현대캐피탈도 이에 동조했다.하지만 1순위 지명권이 유력했던 대한항공과 삼성이 강력히 반발해 협회는 “원칙대로 하자.”며 드래프트 유지로 결론을 내렸다.
이경수와 LG는 2002년 1월 입단 계약을 전격 발표했고,협회는 “규정을 무시한 선수는 인정할 수 없다.”며 등록을 거부해 배구계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이경수는 곧바로 협회를 상대로 선수등록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내 지난해 7월 승소했다.협회의 항소로 법정 공방은 계속됐고,LG는 02∼03슈퍼리그를 보이콧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9월 29일 ‘드래프트를 실시해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한 구단은 LG에 이경수를 양도하고,LG는 향후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권을 제공한다.’는 조정 결정을 내려 해결의 물꼬를 텄다.이튿날 열린 드래프트에서 1순위 지명권을 얻은 대한항공은 이경수를 LG에 넘겼고,마침내 파동은 마무리됐다.
이창구기자
·1979년 대전 출생
·1988년 대전 유성초 3학년 때 배구 시작
·1997년 대전 중앙고 3학년 때 전국대회 3연패
·1998년 한양대 입학,국가대표 발탁,대학부 64연승 달성
·2001년 슈퍼리그 대학부 우승
·2002년 1월 LG화재 입단 계약 ,자유계약 파동
·2003년 9월 법원 화해조정으로 LG화재 입단
돌고래처럼 솟구쳐 올라 상대의 블로킹 위에서 내리꽂는 스파이크의 위력은 변함이 없었다.빙그레 웃는 천진난만한 얼굴도 그대로였다.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자유계약을 맺어 배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뒤 2년 동안 ‘코트의 미아’로 떠돌던 이경수가 돌아왔다.지루한 법정 다툼을 마감하고 LG화재 선수로 인정받은 그는 지난 16일 끝난 전국체전에서 경북대표로 출전,특유의 고공강타를 뽐내며 화려한 부활을 예고했다.
그는 오는 21일부터 동해에서 열리는 실업배구대제전에서 최고 거포의 위상을 되찾겠다고 벼른다.이 대회에서 LG가 결승 토너먼트에 오르면 무적 삼성화재와 맞붙게 돼 그는 김세진과 자존심을 건 정면승부를 벌인다.●올겨울 ‘속죄’ 스파이크 날린다
17일 경기도 이천의 LG인화원 숙소에서 만난 이경수는 말을 아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팀이나 배구계,무엇보다 팬들에게 끼친 심려를 멋진 경기로 날려 드릴 것입니다.”
짤막하게 말을 마치고 ‘속죄의 마음’을 실은 강스파이크를 연신 터뜨릴 뿐이었다.
배구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이경수 파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별로 없다.10년 만에 나올까 말까 한 거포 잡기에 혈안이 됐던 구단들은 드래프트를 지킬 생각이 별로 없었고,배구협회는 드래프트와 자유계약 사이에서 갈지자 행보를 거듭했다.대학들도 드래프트 때문에 선수 몸값이 떨어진다며 아우성 쳤다.
그러나 그는 “가장 큰 책임은 내게 있다.”고 말했다.어쨌든 드래프트를 어긴 당사자는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배구가 팬들의 외면을 받게 된 데 대한 책임도 느낀다고 말했다.하지만 “간절하게 LG에 가고 싶어했던 내 마음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지난 과오를 알기에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 지도 잘 안다.배구가 재미없어진 이유가 삼성의 독주 때문이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우승팀이 뻔한데 왜 뛰냐.”는 냉소주의가 팽배해 삼성과 붙으면 경기를 포기하기 일쑤였다.그는 “우선 삼성을 넘고 싶다.”고 말했다.맞는 말이다.삼성의 ‘갈색폭격기’ 신진식과 ‘라이트 지존’ 김세진이 강타를 터뜨리면 이경수의 칼날같은 스파이크도 터져야 흥미로워진다.그러나 혼자 잘한다고 삼성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LG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삼성의 조직력을 무너뜨리기에는 아직은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LG 노진수 감독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은 틀림없지만 조직력은 하루 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면서 “경수가 얼마나 빨리 적응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시속 115㎞ 녹슬지 않은 스파이크
공백 기간에도 국가대표로 활동한 덕택에 기량은 녹슬지 않았다.최고시속 115㎞를 넘나드는 스파이크 서브,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노련한 틀어때리기,높이와 각도를 이용해 상대 블로킹을 따돌리는 고공강타는 그가 왜 ‘제2의 강만수’로 불리는가를 알게 해준다.
그의 강스파이크를 받아내느라 팔목이 빨갛게 부어오른 강호인 코치는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가 온몸의 힘을 이용해 스윙을 하듯이 경수도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힘을 손목에 모을 줄 안다.”면서 “천부적인 파괴력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불같은 승부욕도 그의 강점이다.평소에는 소극적이지만 일단 코트에 들어서면 공중에 떠있는 공을 때리지 않고는 참지 못한다.집앞까지 따라다니던 소녀팬들을 다시 불러모을 자신이 있다는 이경수.그가 펄펄 날 올 겨울 배구슈퍼리그(V투어)가 기다려진다.
글 이창구기자 window2@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
■‘이경수 파동' 전말
‘이경수 파동’의 핵심인 드래프트제도는 지난 1999년 도입됐다.이전 자유계약하에서 삼성화재가 김세진 신진식 등 알짜들을 싹쓸이하자 대한배구협회는 3년간 한시적 드래프트를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2001년 10월 LG화재가 드래프트 거부를 선언했다.96년 김세진과 먼저 계약했지만 삼성의 창단으로 눈물을 삼킨 LG는 “팀 해체도 불사하겠다.”고 맞섰다.이경수의 한양대 시절 은사였던 송만덕 감독이 이끄는 현대캐피탈도 이에 동조했다.하지만 1순위 지명권이 유력했던 대한항공과 삼성이 강력히 반발해 협회는 “원칙대로 하자.”며 드래프트 유지로 결론을 내렸다.
이경수와 LG는 2002년 1월 입단 계약을 전격 발표했고,협회는 “규정을 무시한 선수는 인정할 수 없다.”며 등록을 거부해 배구계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이경수는 곧바로 협회를 상대로 선수등록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내 지난해 7월 승소했다.협회의 항소로 법정 공방은 계속됐고,LG는 02∼03슈퍼리그를 보이콧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9월 29일 ‘드래프트를 실시해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한 구단은 LG에 이경수를 양도하고,LG는 향후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권을 제공한다.’는 조정 결정을 내려 해결의 물꼬를 텄다.이튿날 열린 드래프트에서 1순위 지명권을 얻은 대한항공은 이경수를 LG에 넘겼고,마침내 파동은 마무리됐다.
이창구기자
2003-10-1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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