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극한투쟁에 익숙해 있다.텔레비전 화면에서 노상 보는 것은 정치인들의 살벌하고 비분강개한 얼굴들이다.목숨을 건 투쟁에 나선 전사들 같다.정치집단간의 도를 넘고 품격 없는 성명전은 갈 때까지 간 것같다.싸우느라 민생을 돌볼 겨를이 없으며 국정은 난맥이라는 질타와 탄식의 소리가 높다.
그러나 싸우는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마이동풍이다. 왜걱정하고 반성하는 척은 안 하겠는가.그러나 그들의 속내는다르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상생(相生)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모두가 말한다.그러나 속으로는 필살(必殺)의 정치를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정치의 극한대립 뒤에는 유권자들의 부추김이 있다.유권자들도 겉으로 타협과 화합을 말하지만 겉 다르고 속 다르게극한대립을 위해 표를 던진다.정치인들에게 표가 얼마나 무서운데 표의 지지없이 감히 극한대립을 할 수 있겠는가.
대립 ·투쟁의 장면은 정치권에서 가장 눈에 잘 뜨이지만극한대립이 거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정신 나간 대립과투쟁은 도처에 널려 있다. 노·사 관계에서 그러하고 장삼이사(張三李四)의 거래에서 그러하고,보행자와 보행자의 관계에서 그러하며 자동차 운전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그러하다.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갈가리 찢길 나라 형편이 걱정스럽다.
우리는 무한갈등의 시대, 극한대립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것 같다.사소한 이끗,줄서 차례를 기다리면 모두에게 돌아갈 이익,주거니 받거니 해야 할 이득,의논해서 나눠먹어야할 이익을 위해 막가는 투쟁들을 한다.탐욕스러운 자들이훑어 먹고 지나가면서 떨어뜨린 부스러기만 주어 먹어도 충분히 배가 부를 수 있는 대량소비시대에 왜들 그러는 것일까? 대립·투쟁의 단초는 물론 자원의 제약에 있다.욕심을 줄이면 넉넉한 자원이지만 탐욕적이면 너무 적은 자원이 된다.우리가 지금 탐욕적이기 때문에 공동의 자원은 콩알같이작아 보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통치권력을 차지하는 자들만이 다 차지하는 오랜독재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독재체제 하에서 분배의 틀을바꾸려는 시도는 역적질에 해당한다.목숨을 걸어야 한다.정치에서 밀리면 죽는다는 생각이 아직도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다.우리는 농경사회의 궁핍정신과 전란중의 피란민 심리를 또한 물려받았다.밥 한 덩어리에 목숨을 걸던 그정신이 우리를 잘 살게도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 정신이 우리를 괴롭힌다.
산업화시대의 물질숭상 정신과 이기주의 정신도 지금 우리를 극한대립의 싸움터로 몰고 있다.서구인들은 이기심 충족과 교환관계에 대한 게임의 규칙을 일찍이 만들어 모든 사람의 이기심을 산업화의 에너지로 승화시켰다.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끗을 위한 투쟁은이전투구가 된다.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의 단체정신은 훼손되고 누구나 의무·책임보다는 권리만을 챙기려 하게 됐다.
가치혼란·가치상실 때문에 투쟁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됐다.경쟁자의 품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의 사회구조는 위와 아래가 너무 가파르게 배치된 급경사 사회다.자리를 차지했을 때와 내놓았을 때는 천양지판이다.직업적 유동성은 낮으며 복지제도는 불완전하다.이러하니 자리를 건 싸움은 극한적일 수밖에 없다.
산업화과정에서 엄청나게 쏟아진 개발이익과 부패한 소득또한 다툼을 격화시켰다.권력을 놓치면 그런 이익을 빼앗기고 과거의 비리가 폭로돼 패가망신할 수도 있으니 권력투쟁은 극단화될 수밖에 없다.
민주정치 과정을 통해 작동돼야 할 공정한 심판장치의 기능 마비도 일탈적 갈등행동을 방치 또는 부채질해 왔다.아직 잔존해 있는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이제 극한대립 없이먹고 살 만한 세상이 열리고 있다. 이판사판으로 다투는 사람들은 세상이 어찌 변해 가는지를 살펴가며 행동해야 할것이다.
오석홍 서울대 명예교수·행정학
그러나 싸우는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마이동풍이다. 왜걱정하고 반성하는 척은 안 하겠는가.그러나 그들의 속내는다르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상생(相生)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모두가 말한다.그러나 속으로는 필살(必殺)의 정치를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정치의 극한대립 뒤에는 유권자들의 부추김이 있다.유권자들도 겉으로 타협과 화합을 말하지만 겉 다르고 속 다르게극한대립을 위해 표를 던진다.정치인들에게 표가 얼마나 무서운데 표의 지지없이 감히 극한대립을 할 수 있겠는가.
대립 ·투쟁의 장면은 정치권에서 가장 눈에 잘 뜨이지만극한대립이 거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정신 나간 대립과투쟁은 도처에 널려 있다. 노·사 관계에서 그러하고 장삼이사(張三李四)의 거래에서 그러하고,보행자와 보행자의 관계에서 그러하며 자동차 운전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그러하다.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갈가리 찢길 나라 형편이 걱정스럽다.
우리는 무한갈등의 시대, 극한대립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것 같다.사소한 이끗,줄서 차례를 기다리면 모두에게 돌아갈 이익,주거니 받거니 해야 할 이득,의논해서 나눠먹어야할 이익을 위해 막가는 투쟁들을 한다.탐욕스러운 자들이훑어 먹고 지나가면서 떨어뜨린 부스러기만 주어 먹어도 충분히 배가 부를 수 있는 대량소비시대에 왜들 그러는 것일까? 대립·투쟁의 단초는 물론 자원의 제약에 있다.욕심을 줄이면 넉넉한 자원이지만 탐욕적이면 너무 적은 자원이 된다.우리가 지금 탐욕적이기 때문에 공동의 자원은 콩알같이작아 보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통치권력을 차지하는 자들만이 다 차지하는 오랜독재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독재체제 하에서 분배의 틀을바꾸려는 시도는 역적질에 해당한다.목숨을 걸어야 한다.정치에서 밀리면 죽는다는 생각이 아직도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다.우리는 농경사회의 궁핍정신과 전란중의 피란민 심리를 또한 물려받았다.밥 한 덩어리에 목숨을 걸던 그정신이 우리를 잘 살게도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 정신이 우리를 괴롭힌다.
산업화시대의 물질숭상 정신과 이기주의 정신도 지금 우리를 극한대립의 싸움터로 몰고 있다.서구인들은 이기심 충족과 교환관계에 대한 게임의 규칙을 일찍이 만들어 모든 사람의 이기심을 산업화의 에너지로 승화시켰다.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끗을 위한 투쟁은이전투구가 된다.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의 단체정신은 훼손되고 누구나 의무·책임보다는 권리만을 챙기려 하게 됐다.
가치혼란·가치상실 때문에 투쟁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됐다.경쟁자의 품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의 사회구조는 위와 아래가 너무 가파르게 배치된 급경사 사회다.자리를 차지했을 때와 내놓았을 때는 천양지판이다.직업적 유동성은 낮으며 복지제도는 불완전하다.이러하니 자리를 건 싸움은 극한적일 수밖에 없다.
산업화과정에서 엄청나게 쏟아진 개발이익과 부패한 소득또한 다툼을 격화시켰다.권력을 놓치면 그런 이익을 빼앗기고 과거의 비리가 폭로돼 패가망신할 수도 있으니 권력투쟁은 극단화될 수밖에 없다.
민주정치 과정을 통해 작동돼야 할 공정한 심판장치의 기능 마비도 일탈적 갈등행동을 방치 또는 부채질해 왔다.아직 잔존해 있는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이제 극한대립 없이먹고 살 만한 세상이 열리고 있다. 이판사판으로 다투는 사람들은 세상이 어찌 변해 가는지를 살펴가며 행동해야 할것이다.
오석홍 서울대 명예교수·행정학
2002-03-26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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