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은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기울인 평생의노력,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이 상을 수상하게됐습니다.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한 화해의 절차를 위해 상을 수여하는 것이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그에 대한 대답으로 김 대통령의 인권을 위한 그 동안의 노력이 최근 남북한 관계의진전과는 별도로 수상후보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북한과의 화해를 위한 강력한 김 대통령의 다짐 및 이행,특히 지난 1년 동안 이룩한 업적이 이번 수상에 새롭고 중요한 몫을더한 것도 역시 명백합니다.
평화상은 지금까지 이룩해 온 조처에 대해 수여되는 것입니다.그러나 노벨평화상의 역사에서 자주 보아 온 것처럼 올해도 역시 평화와화해를 위한 머나먼 길에 더욱 진척이 있기를 격려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넓은 범위에서 용기의 문제입니다.김 대통령은 고착화된 50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아마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전선 너머로협조의 손길을 뻗으려는 의지를 지녀왔습니다.그의 의지는 개인적,정치적 용기이며 유감스럽게도 다른 분쟁지역에서는 너무 자주 결여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재 김대중씨는 민주한국의 대통령입니다.김 대통령의 집권까지의노정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수십년 동안 그는 권위주의 독재체제와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을 했습니다.
가혹한 교도소 환경 속에서도 김대중씨는 삶을 바쳐서 해야 할 일을찾아내게 되었습니다. 불굴의 낙관적 태도를 가지고 그는 교도소 안에서 발견한 ‘즐거움’에 대해 썼습니다.동양과 서양의 모든 종류의서적 통독이 그것입니다.신학·정치학·경제학·역사 그리고 문학 서적들입니다.가족과의 짧은 면회시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갖가지방해 시도가 있었음에도,그와 가장 가까웠던 인사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원에서 꽃을 돌보는 일도 허용되었습니다.
김대중씨의 얘기는 몇몇 다른 평화상 수상자,특히 넬슨 만델라와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경험과 공통되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상을 받지는않았지만 수상할 자격이 있었던 마하트마 간디의 그것과 함께 말입니다.김대중씨가 간직한 불굴의 정신은 국외자들에게 거의 초인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이런 점에서 이번 수상은 보다 진지한 면이 있습니다.
김대중씨는 한국의 전면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과 적극적인 협조관계를 추진하고 있습니다.‘햇볕’이라는 말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햇볕과 바람이한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한 데서 따온 것입니다.‘햇볕정책’은 바람을 막지 않더라도 남북한이 공동의 이익을 서로 나누고 이를 강화함으로써 최소한 추위를 누그러뜨리자는 것입니다.김대중씨는남한이 북한을 합병하거나 흡수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시간이 걸리고 아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목표는 통일입니다.
김대중씨가 현재 진행 중인 해빙과 화해의 주동자라는 점은 의심할여지가 없습니다.아마 그의 역할은 동서독 간의 관계 정상화에 아주중요한 동방정책 추진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빌리 브란트에 비교될수 있습니다.남북 이산가족 상봉장면은 전세계에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냉전의 빙하시대는 끝났습니다.세계는 ‘햇볕정책’이 한반도의 마지막 냉전 잔재를 녹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과정은 시작되었으며 오늘 상을 받는 김대중씨 보다더 많은 기여를 한 분은 없습니다.시인의 말처럼 “첫 번째 떨어지는물방울이 가장 용감하노라”.
◆ 김대중대통령 연보.
■1925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아버지 김운식(金雲植)씨와 어머니장수금(張守錦)여사의 4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1933년 하의도보통학교 입학,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해 수석 졸업■1939년 목포상업학교 입학■1945년 4월 차용애씨와 결혼해 홍일(弘一)·홍업(弘業) 두 아들 둠■1954년 목포에서 민의원선거에 출마해 낙선■1956년 10월 민주당 입당■1959년 6월 강원도 인제 재선거에서 낙선■1961년 5월14일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5·16 쿠데타로 수감■1962년 5월 이희호(李姬鎬)여사와 재혼■1963년 11월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에 당선■1967년 7대 의원 당선■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후보 당선■1971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朴正熙)후보에게 패배■1973년 8월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공작원에게 피랍■1976년 3월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1980년 5월 내란음모죄로 구속■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돼 사형 확정■1982년 12월 미국 망명■1985년 2월 귀국한 뒤 동교동 자택에 감금■1987년 12월 13대 대통령선거에서 낙선■1992년 12월 14대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유학차 영국으로 향발■1993년 7월 귀국■1994년 1월 아·태평화재단 설립■1995년 7월 정계 복귀■1997년 12월 15대 대통령 당선■2000년 6월 평양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2000년 12월10일 노벨평화상 수상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한 화해의 절차를 위해 상을 수여하는 것이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그에 대한 대답으로 김 대통령의 인권을 위한 그 동안의 노력이 최근 남북한 관계의진전과는 별도로 수상후보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북한과의 화해를 위한 강력한 김 대통령의 다짐 및 이행,특히 지난 1년 동안 이룩한 업적이 이번 수상에 새롭고 중요한 몫을더한 것도 역시 명백합니다.
평화상은 지금까지 이룩해 온 조처에 대해 수여되는 것입니다.그러나 노벨평화상의 역사에서 자주 보아 온 것처럼 올해도 역시 평화와화해를 위한 머나먼 길에 더욱 진척이 있기를 격려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넓은 범위에서 용기의 문제입니다.김 대통령은 고착화된 50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아마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전선 너머로협조의 손길을 뻗으려는 의지를 지녀왔습니다.그의 의지는 개인적,정치적 용기이며 유감스럽게도 다른 분쟁지역에서는 너무 자주 결여되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재 김대중씨는 민주한국의 대통령입니다.김 대통령의 집권까지의노정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수십년 동안 그는 권위주의 독재체제와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을 했습니다.
가혹한 교도소 환경 속에서도 김대중씨는 삶을 바쳐서 해야 할 일을찾아내게 되었습니다. 불굴의 낙관적 태도를 가지고 그는 교도소 안에서 발견한 ‘즐거움’에 대해 썼습니다.동양과 서양의 모든 종류의서적 통독이 그것입니다.신학·정치학·경제학·역사 그리고 문학 서적들입니다.가족과의 짧은 면회시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갖가지방해 시도가 있었음에도,그와 가장 가까웠던 인사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원에서 꽃을 돌보는 일도 허용되었습니다.
김대중씨의 얘기는 몇몇 다른 평화상 수상자,특히 넬슨 만델라와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경험과 공통되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상을 받지는않았지만 수상할 자격이 있었던 마하트마 간디의 그것과 함께 말입니다.김대중씨가 간직한 불굴의 정신은 국외자들에게 거의 초인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이런 점에서 이번 수상은 보다 진지한 면이 있습니다.
김대중씨는 한국의 전면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과 적극적인 협조관계를 추진하고 있습니다.‘햇볕’이라는 말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햇볕과 바람이한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한 데서 따온 것입니다.‘햇볕정책’은 바람을 막지 않더라도 남북한이 공동의 이익을 서로 나누고 이를 강화함으로써 최소한 추위를 누그러뜨리자는 것입니다.김대중씨는남한이 북한을 합병하거나 흡수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시간이 걸리고 아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목표는 통일입니다.
김대중씨가 현재 진행 중인 해빙과 화해의 주동자라는 점은 의심할여지가 없습니다.아마 그의 역할은 동서독 간의 관계 정상화에 아주중요한 동방정책 추진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빌리 브란트에 비교될수 있습니다.남북 이산가족 상봉장면은 전세계에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냉전의 빙하시대는 끝났습니다.세계는 ‘햇볕정책’이 한반도의 마지막 냉전 잔재를 녹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과정은 시작되었으며 오늘 상을 받는 김대중씨 보다더 많은 기여를 한 분은 없습니다.시인의 말처럼 “첫 번째 떨어지는물방울이 가장 용감하노라”.
◆ 김대중대통령 연보.
■1925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아버지 김운식(金雲植)씨와 어머니장수금(張守錦)여사의 4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1933년 하의도보통학교 입학,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해 수석 졸업■1939년 목포상업학교 입학■1945년 4월 차용애씨와 결혼해 홍일(弘一)·홍업(弘業) 두 아들 둠■1954년 목포에서 민의원선거에 출마해 낙선■1956년 10월 민주당 입당■1959년 6월 강원도 인제 재선거에서 낙선■1961년 5월14일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5·16 쿠데타로 수감■1962년 5월 이희호(李姬鎬)여사와 재혼■1963년 11월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에 당선■1967년 7대 의원 당선■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후보 당선■1971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朴正熙)후보에게 패배■1973년 8월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공작원에게 피랍■1976년 3월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1980년 5월 내란음모죄로 구속■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돼 사형 확정■1982년 12월 미국 망명■1985년 2월 귀국한 뒤 동교동 자택에 감금■1987년 12월 13대 대통령선거에서 낙선■1992년 12월 14대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유학차 영국으로 향발■1993년 7월 귀국■1994년 1월 아·태평화재단 설립■1995년 7월 정계 복귀■1997년 12월 15대 대통령 당선■2000년 6월 평양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2000년 12월10일 노벨평화상 수상
2000-12-11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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