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35세때 러 혁명후 탈출… 생애 마감때까지 불서 활동/스위스 손녀가 작품71점 벨로루시의 민스크서 전시회
마르크 샤갈이 고향인 벨로루시에서 쫓겨난지 75년만에 고향을 찾았다.유태인이면서 옛소련공화국인 벨로루시 태생인 그는 35세때인 1922년 러시아혁명후 소련을 탈출한다.당시 공산주의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피하려 외국으로 나가려는 지성인의 물결에 합류,이후 프랑스에 정착한다.그가 고향을 등지자 소련당국은 고향인 벨로루시는 물론 소련 전지역에서 그의 작품이 전시되는 것을 영구금지시켰다.물론 소련은 샤갈이 미처 갖고 나가지 못한 작품을 반출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샤갈의 작품이 고향을 다시 찾게 된 것은 스위스에 사는 손녀 메이어 그라버씨(55)의 주선때문이다.그녀는 『샤갈 작품의 정신세계는 알게 모르게 그의 고향이 표현돼 있어 고향을 찾지 않고는 그의 영혼을 달래주기 힘들었다』며 전시회의 의미를 설명한다.
6월 초부터 민스크박물관에서 시작된 전시회의 또 다른 의미는 이를 계기로 옛소련때문에 ‘문화 황무지’로 남을수 밖에 없었던 벨로루시 공화국에 국가자존심을 회복시켜줄 것이라는 점이다.아직도 상당수의 예술인들은 샤갈이 벨로루시에서 청소년기와 중년을 보냈다는 사실을 모른다.당시 소련당국은 그가 유럽으로 탈출하면서 모든 백과사전과 예술관련사전에서 그의 이름을 지웠거나 벨로루시태생이라는 것을 나타내지 못하게 한 때문이다.
샤갈이 고향 벨로루시에서 얼마나 탄압을 받았는가는 샤갈탄생100주년 기념을 즈음한 옛소련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1987년 이스라엘이 탄생100주년 기념전을 화려하게 열자,소련의 지방정부였던 벨로루시는 일부 백과사전편집진들에게 압력을 넣어 반유태인 논조로 글을 싣도록 강요했다.한 편집인이 법적소송을 걸다 강제사직 당했고 한 영화인은 샤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제작했으나 벨로루시정부는 시사회조차 갖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미술인들은 『우리가 알기론 샤갈이 레닌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오히려 레닌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그림을 그려 당국에서 추방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가 반공산주의자의 선봉이었음을 지적했다.
그라버씨가 가져올 작품은 구아슈 수채화물 8점,샤갈작품모음집에서의 수채화 4점,파리 현대미술관과 그의 생애 대부분을 보냈던 프랑스 니스의 샤갈미술관에서 빌려온 석판화 59점이다.샤갈이 해금돼 그의 기념관이 벨로루시 수도 민스크에서 동쪽으로 250킬로미터 떨어진 비테브스크 포크로브스카야거리 한 구석에 세워진 것은 1992년이었다.<모스크바=류민 특파원>
마르크 샤갈이 고향인 벨로루시에서 쫓겨난지 75년만에 고향을 찾았다.유태인이면서 옛소련공화국인 벨로루시 태생인 그는 35세때인 1922년 러시아혁명후 소련을 탈출한다.당시 공산주의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피하려 외국으로 나가려는 지성인의 물결에 합류,이후 프랑스에 정착한다.그가 고향을 등지자 소련당국은 고향인 벨로루시는 물론 소련 전지역에서 그의 작품이 전시되는 것을 영구금지시켰다.물론 소련은 샤갈이 미처 갖고 나가지 못한 작품을 반출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샤갈의 작품이 고향을 다시 찾게 된 것은 스위스에 사는 손녀 메이어 그라버씨(55)의 주선때문이다.그녀는 『샤갈 작품의 정신세계는 알게 모르게 그의 고향이 표현돼 있어 고향을 찾지 않고는 그의 영혼을 달래주기 힘들었다』며 전시회의 의미를 설명한다.
6월 초부터 민스크박물관에서 시작된 전시회의 또 다른 의미는 이를 계기로 옛소련때문에 ‘문화 황무지’로 남을수 밖에 없었던 벨로루시 공화국에 국가자존심을 회복시켜줄 것이라는 점이다.아직도 상당수의 예술인들은 샤갈이 벨로루시에서 청소년기와 중년을 보냈다는 사실을 모른다.당시 소련당국은 그가 유럽으로 탈출하면서 모든 백과사전과 예술관련사전에서 그의 이름을 지웠거나 벨로루시태생이라는 것을 나타내지 못하게 한 때문이다.
샤갈이 고향 벨로루시에서 얼마나 탄압을 받았는가는 샤갈탄생100주년 기념을 즈음한 옛소련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1987년 이스라엘이 탄생100주년 기념전을 화려하게 열자,소련의 지방정부였던 벨로루시는 일부 백과사전편집진들에게 압력을 넣어 반유태인 논조로 글을 싣도록 강요했다.한 편집인이 법적소송을 걸다 강제사직 당했고 한 영화인은 샤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제작했으나 벨로루시정부는 시사회조차 갖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미술인들은 『우리가 알기론 샤갈이 레닌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오히려 레닌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그림을 그려 당국에서 추방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가 반공산주의자의 선봉이었음을 지적했다.
그라버씨가 가져올 작품은 구아슈 수채화물 8점,샤갈작품모음집에서의 수채화 4점,파리 현대미술관과 그의 생애 대부분을 보냈던 프랑스 니스의 샤갈미술관에서 빌려온 석판화 59점이다.샤갈이 해금돼 그의 기념관이 벨로루시 수도 민스크에서 동쪽으로 250킬로미터 떨어진 비테브스크 포크로브스카야거리 한 구석에 세워진 것은 1992년이었다.<모스크바=류민 특파원>
1997-07-03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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