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진 열사묘역에 항일연군 유해만 안장/일제엔 공동 항거했어도 타계파 푸대접/현지엔 「열사 14명중 12명이 조선인」 수록
길림성 장백현 일대에는 어느 지역 못지않게 항일투쟁의 역사가 어려있다.대한독립광정단,대한독립광복단,대한독립군,동북항일연군이 주로 장백지역에서 활약했다.그러나 다른 항일무장단체들은 동북항일연군에 가려 독립운동의 역사속에서 미미한 존재가 되었다.그도 그럴 것이 항일연군은 중국과 조선이 합작한 무장단체였고 이념도 다른 항일무장단체들과 달랐다.
오늘 날 「장백현지」에 오른 항일열사는 14명이다.이 가운데 12명이 조선족인데,항일전쟁시기 중·조 두나라 인민은 공동의 적 일제를 무찌르기 위해 무수한 생명을 바쳤다고 기록했다.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혁명열사기념비와 묘원이 장백조선족자치현 장백진 탑산에 있다.이 묘원에 있던 항일열사 이계순(1914 ∼1938년)의 골회는 북한에서 묘셔갔다고 한다.
이계순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헤사즈거 우밀령병원에서 신병을 치료하던 중에 일군토벌대에게 붙잡혀장백현 감옥에 수감되었다.그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그와 같이 체포된 동지들의 목을 베어 보여주면서 위협했지만 항일연군의 기밀을 불지 않았다.그래서 19 38년1월 총살되었다.그의 골회를 뒤늦게 나마 북한에서 가져갔다.북한 나름대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북한서 유해 모셔가
오늘 날 북한은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동북항일연군 빨치산 투쟁에서 찾고 있다.그러한 이념에 밀려 다른 항일무장단체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은 유택마저 변변치 못했다.탑선에 있는 혁명열사묘역에서 내려오다 옥수수 밭 가장자리에 자리한 독립운동가 무덤앞에 발목이 잡혔다.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치고도 혁명열사묘역에 들어가지 못한 무덤은 쓸쓸했다.이념을 초월한 민족차원의 항일독립운동사가 하루빨리 정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동북항일연군에 얽힌 일화들이 장백현 쪽에 많이 전해오고 있다.장백현 16도구에서 태어나 현재 장백진에 살고있는 조창원(75)노인의 이야기에도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항일연군의 한 소대장이 압록강을 건너다 일본군의 총에 맞아 떠내려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그러나 부대를 찾지 못해 숨어살다 광복을 맞았다.그 후에 평안북도 협동농장에서 돼지를 치며 조용히 살았는데,우연한 기회에 노동당 세포위원장이 그의 신상을 알고 중앙에 보고했다.
그런 어느 날 김일성의 부름을 받고 평양으로 갔다.김일성은 물론 오진우도 만났다.감격의 상봉이 끝나자 김일성과 오진우가 높은 직급을 줄테니 평양으로 오라고 권했으나 그는 끝내 사양하고 돼지를 치며 살았다는 내용이다.조노인의 말이 전적으로 실화인지,아니면 떠돌아다니는 풍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일성 생전에 북한 지도부가 평가한 동북항일연군의 위상일 것이다.
일제시대 만주국의 조선인 관리들 중에는 독립군을 봐주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다.그 조노인이 입담 있게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마치 현장을 보기라도 한 듯이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장백현청 사법계에 오상수라는 주임이 있었디요.한번은 항일군 두 명이 잡혀왔는데 다가 총살감이었다.이 말입네다.오씨가 출근하면서 마누라 한테 이런저런 일을 준비시켰디요.출근을 한 오씨가 순사를 불러 두 항일군을 자기집에 데려가 장작을 패라고 일렀지 뭡네까.순사는 장작 패는 항일군을 지키고 있다가 지루해서 잠깐 자리를 비웠디요.그때 오씨 마누라가 미리 준비한 만두 보따리를 항일군에게 주고 도망치라는 눈치를 했다고 기래요.순사는 그날 탈직죄로 체포 되었디요』
○김일성,북 체류 회유
압록강 연안을 답사하면서 장백현이 아닌 요령성 관전현 협피구향에서도 항일연군 이야기를 들었다.좀 전설적인 내용이었다.평북 선천군 농연면 태생의 문학근(73)노인의 구술인데 어디까지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부터 들은 것이라는 토를 달았다.
『데(제)게 먼 촌수로 형뻘이 되는 항일군이 있었는데 이름이 문학빈이었다고 기래요.관전현 포자연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들었디요.일본군이 체포하러 오면 집도 날아넘고 밭고랑은 열두어 이랑을 건너 뛰었다지 뭡네까.문학빈이라는 말만 들어도 덕(적)들이 벌벌 떨었다고 하데요.광복후에는 당(장)개석 국민당군 연대당(장)이 되어서리 환인까지 왔다갔다고도 하고 심양으로해서 남한으로 들어갔다는 말도 있디요』
그로 미루어 보면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해서 모두가 어떤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것은 아닌 듯 싶다.오랫동안 이념적 계급투쟁을 선호하면서 객관적 독립운동 연구가 부족했던 탓에 생동적이고 믿음직한 자료를 찾기가 매우 힘들게 되었다.그런데 장백현에서 조선족 교육사업에 일생을 몰두한 이권수(72)선생에게서 동북항일연군 이외 다른 무장독립운동 단체에 관한 실상을 소상히 전해들었다.
○홍범도 장군도 활약
『장백현 일대의 항일운동은 합방이후 시작됐디요.대한독립광정단과 대한독립광복단,대한독립군이 있었댔습네다.장백현을 근거지로 한 항일독립운동단체들은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의 주재소나 경찰서까지 습격했댔디요.그중에 홍범도가 영솔한 대한독립군은 17도구 근처에 있었다고 기래요.그래서리 마을 이름도 독립군촌이었디요.독립군들은 낮이면 농사를 짓고 밤이면 훈련을 한 농사꾼 군인였습네다.당시 장백현 조선족들은 너나 없이 살림이 어려웠지만 독립군에게 의무금을 정기적으로 냈디요』
이노인은 「장백 조선족」의 저자인지라 책을 집필하기 위해 독립군의 발자취도 꽤나 추적했다.그래서 의무금 납부액을 정확히 조사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독립군에게 주는 의무금은 빈부에 따라 10∼30원이 부과되었다.당시 밀이 한 섬에 7원50전,하루 품삯이 30전,한 해를 일한 머슴 새경이 30∼50원이었으니까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또 돈량이나 있는 사람들은 의무금 말고 별도의 군자금을 냈다.군자금은 공개할 수 없는 돈이라고 해서 「벙어리 돈」이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길림성 장백현 일대에는 어느 지역 못지않게 항일투쟁의 역사가 어려있다.대한독립광정단,대한독립광복단,대한독립군,동북항일연군이 주로 장백지역에서 활약했다.그러나 다른 항일무장단체들은 동북항일연군에 가려 독립운동의 역사속에서 미미한 존재가 되었다.그도 그럴 것이 항일연군은 중국과 조선이 합작한 무장단체였고 이념도 다른 항일무장단체들과 달랐다.
오늘 날 「장백현지」에 오른 항일열사는 14명이다.이 가운데 12명이 조선족인데,항일전쟁시기 중·조 두나라 인민은 공동의 적 일제를 무찌르기 위해 무수한 생명을 바쳤다고 기록했다.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혁명열사기념비와 묘원이 장백조선족자치현 장백진 탑산에 있다.이 묘원에 있던 항일열사 이계순(1914 ∼1938년)의 골회는 북한에서 묘셔갔다고 한다.
이계순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헤사즈거 우밀령병원에서 신병을 치료하던 중에 일군토벌대에게 붙잡혀장백현 감옥에 수감되었다.그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그와 같이 체포된 동지들의 목을 베어 보여주면서 위협했지만 항일연군의 기밀을 불지 않았다.그래서 19 38년1월 총살되었다.그의 골회를 뒤늦게 나마 북한에서 가져갔다.북한 나름대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북한서 유해 모셔가
오늘 날 북한은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동북항일연군 빨치산 투쟁에서 찾고 있다.그러한 이념에 밀려 다른 항일무장단체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은 유택마저 변변치 못했다.탑선에 있는 혁명열사묘역에서 내려오다 옥수수 밭 가장자리에 자리한 독립운동가 무덤앞에 발목이 잡혔다.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치고도 혁명열사묘역에 들어가지 못한 무덤은 쓸쓸했다.이념을 초월한 민족차원의 항일독립운동사가 하루빨리 정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동북항일연군에 얽힌 일화들이 장백현 쪽에 많이 전해오고 있다.장백현 16도구에서 태어나 현재 장백진에 살고있는 조창원(75)노인의 이야기에도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항일연군의 한 소대장이 압록강을 건너다 일본군의 총에 맞아 떠내려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그러나 부대를 찾지 못해 숨어살다 광복을 맞았다.그 후에 평안북도 협동농장에서 돼지를 치며 조용히 살았는데,우연한 기회에 노동당 세포위원장이 그의 신상을 알고 중앙에 보고했다.
그런 어느 날 김일성의 부름을 받고 평양으로 갔다.김일성은 물론 오진우도 만났다.감격의 상봉이 끝나자 김일성과 오진우가 높은 직급을 줄테니 평양으로 오라고 권했으나 그는 끝내 사양하고 돼지를 치며 살았다는 내용이다.조노인의 말이 전적으로 실화인지,아니면 떠돌아다니는 풍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일성 생전에 북한 지도부가 평가한 동북항일연군의 위상일 것이다.
일제시대 만주국의 조선인 관리들 중에는 독립군을 봐주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다.그 조노인이 입담 있게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마치 현장을 보기라도 한 듯이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장백현청 사법계에 오상수라는 주임이 있었디요.한번은 항일군 두 명이 잡혀왔는데 다가 총살감이었다.이 말입네다.오씨가 출근하면서 마누라 한테 이런저런 일을 준비시켰디요.출근을 한 오씨가 순사를 불러 두 항일군을 자기집에 데려가 장작을 패라고 일렀지 뭡네까.순사는 장작 패는 항일군을 지키고 있다가 지루해서 잠깐 자리를 비웠디요.그때 오씨 마누라가 미리 준비한 만두 보따리를 항일군에게 주고 도망치라는 눈치를 했다고 기래요.순사는 그날 탈직죄로 체포 되었디요』
○김일성,북 체류 회유
압록강 연안을 답사하면서 장백현이 아닌 요령성 관전현 협피구향에서도 항일연군 이야기를 들었다.좀 전설적인 내용이었다.평북 선천군 농연면 태생의 문학근(73)노인의 구술인데 어디까지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부터 들은 것이라는 토를 달았다.
『데(제)게 먼 촌수로 형뻘이 되는 항일군이 있었는데 이름이 문학빈이었다고 기래요.관전현 포자연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들었디요.일본군이 체포하러 오면 집도 날아넘고 밭고랑은 열두어 이랑을 건너 뛰었다지 뭡네까.문학빈이라는 말만 들어도 덕(적)들이 벌벌 떨었다고 하데요.광복후에는 당(장)개석 국민당군 연대당(장)이 되어서리 환인까지 왔다갔다고도 하고 심양으로해서 남한으로 들어갔다는 말도 있디요』
그로 미루어 보면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해서 모두가 어떤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것은 아닌 듯 싶다.오랫동안 이념적 계급투쟁을 선호하면서 객관적 독립운동 연구가 부족했던 탓에 생동적이고 믿음직한 자료를 찾기가 매우 힘들게 되었다.그런데 장백현에서 조선족 교육사업에 일생을 몰두한 이권수(72)선생에게서 동북항일연군 이외 다른 무장독립운동 단체에 관한 실상을 소상히 전해들었다.
○홍범도 장군도 활약
『장백현 일대의 항일운동은 합방이후 시작됐디요.대한독립광정단과 대한독립광복단,대한독립군이 있었댔습네다.장백현을 근거지로 한 항일독립운동단체들은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의 주재소나 경찰서까지 습격했댔디요.그중에 홍범도가 영솔한 대한독립군은 17도구 근처에 있었다고 기래요.그래서리 마을 이름도 독립군촌이었디요.독립군들은 낮이면 농사를 짓고 밤이면 훈련을 한 농사꾼 군인였습네다.당시 장백현 조선족들은 너나 없이 살림이 어려웠지만 독립군에게 의무금을 정기적으로 냈디요』
이노인은 「장백 조선족」의 저자인지라 책을 집필하기 위해 독립군의 발자취도 꽤나 추적했다.그래서 의무금 납부액을 정확히 조사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독립군에게 주는 의무금은 빈부에 따라 10∼30원이 부과되었다.당시 밀이 한 섬에 7원50전,하루 품삯이 30전,한 해를 일한 머슴 새경이 30∼50원이었으니까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또 돈량이나 있는 사람들은 의무금 말고 별도의 군자금을 냈다.군자금은 공개할 수 없는 돈이라고 해서 「벙어리 돈」이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1995-10-06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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