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2)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2)

허동찬 기자 기자
입력 1993-03-04 00:00
수정 1993-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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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시절:1/의문투성이의 체류시점/“27년 육문중 전학”… 「26년 입학」 주장 수정/초기 혁명활동 근거마련 노려 이력 변조/주변선 “28년 무송서 만났다” 회고

김일성은 언제부터 길림에 있었는가.

북한에서는 그가 길림 육문중학교에 들어간 시기를 몇번이나 변경해왔다.해방후 60년대까지 그들은 그가 이 학교에 1926년에 입학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특히 61년에 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에서는 그 입학시기가 「26년 여름」이었다고 암시하기까지 하고 있다.<주①>

○68년부터 연도변경

그런데 68년 전기부터 그들은 이 연도를 변경하여 1927년이라고 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이 무렵부터 입학이란 용어가 애매하게 되어 「전학」이 시사되어 나가더니 지금은 전학이 기정사실화 되어버렸다.그 전학시기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에서 「봄」으로 되고 72년의 어떤 전기부터는 엄동설한인 27년 1월17일이라고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주②>

중학에 들어간 연도가 26년이었다가 27년으로 바뀌어졌다든가 입학이 전학으로 되었다든가 그 시기가 여름부터 봄,봄부터 한겨울,한겨울이라도 특정된 날짜인 1월17일로 변경되어 나간다면 이것이 보통 서민들의 이력서 같으면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법적 문제로 될 것이다.그런데 북한에서는 일국의 최고지도자가 반세기란 장구한 세월을 이런 경력변조에 허비하고 있다.

김일성은 최근의 북한 주장 같이 27년 1월14일에 길림으로 가서 17일에 육문중학교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우리는 이런 날짜놀음에 놀아나지 말고 그가 27년 상반기에는 길림에 없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가 이 무렵 길림에 없었다는 것은 북한 문헌을 분석해 보더라도 확실하다.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하여 조선노동당이 해방전에 그의 변두리에 있었던 인물들을 총동원하여 그가 어떤 시기 어떤 공적을 쌓았는가를 증언하는 「회상기」를 쓰게 하고 있다.그리하여 60년부터 이 회상기들을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란 표제 밑에 현재까지 6권을 출판하고 있다.

○경력위조에 반세기

또 이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는 70년부터 4권짜리 연대순으로 재편집되었다.그중 1932년까지의 그의 「초기혁명활동」을 회상한 제1권은 편집이 어려웠던지 77년에 와서야 겨우 출판되고 있다.

그런데 이 제1권의 권두를 차지하는 채규룡의 회상기 「인민대중을 교양각성시키기 위하여」에서는 그가 김일성을 무송에서 만난 날짜를 1928년 1월이라고 하고 있다.이 일은 그의 「초기혁명활동」목격자는 아무리 연도를 거슬러 올라가도 28년 1월보다 전에는 찾을 수가 없다는 말로 된다.

채규룡의 이 회상은 사실은 29년에 무송에서 결성된 국민부 계통의 소년동맹 활동을 노동당이 28년의 일로 왜곡하고 있는 글이다.<주③> 그러나 여기서는 왜곡된 사실은 차치하고 28년1월이란 날짜만을 문제로 삼아본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초기혁명활동」을 증언하는 증인을 정력적으로 찾고 있다.회고록에 실린 여성독립운동가 이관린을 예로 들면 그는 중국인과 결혼하여 손자까지 두고 있었고 민족주의자였던 경력 탓에 북한에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20년대 후반,무송에서 만난 강반석의 아들 김성주가 북한 통치자 김일성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노동당은 초야에 파묻혀 살고 있는 이러한 이관린을 찾고 또 찾았다.그리하여 겨우 70년대 초에 찾아낸 그들은 그후 80년대 후반까지 기다린 끝에 가족을 떠날 결심을 한 그를 평양까지 데리고 와서 홀몸으로 살게 하였다.몇년 안가서 죽은 이관린을 그들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하였다.<주④>

이 경우를 보더라도 김일성은 자기의 우상화를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는 권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이관린이 과연 26년에 만났는가 어땠는가는 객관적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유일독재를 확립한 후의 김일성은 20년대 후반에 자기와 만난 증인이라면 어떤 수작을 꾸미더라도 기어코 그를 증언대에 세우고야 마는 집념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어떠한 무리수도 마다하지 않는 김일성이 20년대 후반에 무송에 있었던 채규룡으로 하여금 회상을 쓰게 하였다.그리고 채규룡이 쓴 29년1월의 국민부 산하 소년동맹 활동을 일부러 28년1월로 끄집어 올리는 왜곡을 감행한 후에 이 「회상」을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연대순1」의 권두에 가져온 것이다.

○사실 증언자 전무

이러한 곡절을 알고 보면 우리는 누구라도 김일성이 1927년에 했다는 「초기혁명활동」에 대하여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그에게는 27년에 있은 일은커녕 28년에 있었다는 「일」조차도 29년에 실지로 있었던 일을 앞당겨 가져오지 않으면 「증명」해 줄 사람이 없다.

자기를 정당화하는데 있어서 김일성 같이 강한 집념을 가진 인물은 없고 또 그와 같이 이 일에 대하여 막강한 권력을 장기간 행사한 권력자도 없다.그런데도 27년 상반기의 길림시절을 회상해주는 증언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길림에 없었다는 강력한 반증으로 되는 것이다.

<주해> ①동서 한국판 232면 ②「인류해방의 구성 김일성원수」백봉 저 인문과학사 간 21면 ③평전 255면 이하 ④「세기와 더불어 1」184면 이하
1993-03-04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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