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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시민 편익에 희생된 버스기사 건강권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시민 편익에 희생된 버스기사 건강권

최영권 기자
최영권 기자
입력 2021-04-29 16:37
업데이트 2021-05-03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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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번 버스 기사 이수희(55)씨가 29일 오전 8시 30분쯤 버스 승객들에게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한 뒤 지하철 교대역 화장실로 뛰어가고 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742번 버스 기사 이수희(55)씨가 29일 오전 8시 30분쯤 버스 승객들에게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한 뒤 지하철 교대역 화장실로 뛰어가고 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죄송하지만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서울 시내버스 742번 운전기사 이수희(55)씨는 29일 오전 8시 30분쯤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교대역 10번 출구로 질주했다. 4분 만에 운전석에 돌아온 이씨는 “소변 마려울까 봐 물 한 모금 안 마셨는데…”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서울시가 지난 1월 742번 버스 노선을 연장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742번 버스는 운행 구간이 47.3km에서 57.9km로 늘었다. 운행시간은 3시간 13분에서 4시간으로 증가했다. 출퇴근 교통체증 시간대에는 더 걸린다. 지난 26일 작성된 운전자 근무표에 따르면 오후 4시 3분 차고지를 출발한 고모씨는 오후 8시 45분이 돼서야 운전대를 놓을 수 있었다.

살인적인 격무에 시달리는 742번 운전기사 송만수(50) 선진운수 노동조합 총무부장은 지난달 ‘서울시의 무분별한 노선 연장으로 버스 기사들이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리고 서울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송씨는 “시민 안전을 위해서라도 버스 기사들의 장거리 운행을 개선해달라”고 말했다.
선진운수 김승환(49) 씨가 운행하는 742번 버스가 29일 오전 7시 26분 문을 열고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선진운수 김승환(49) 씨가 운행하는 742번 버스가 29일 오전 7시 26분 문을 열고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29일 서울시에 따르면 3월 기준 서울 시내버스 노선 338개 가운데 운행거리가 60㎞ 이상이거나 운행 시간이 4시간 이상인 장거리 운행 노선은 모두 27개다. 경기 양주 덕정리와 종로5가를 오가는 108번의 운행거리는 88.4㎞(4시간 20분)로 최장 노선이다. 운행 시간으로는 도봉산역과 시흥대교를 오가는 150번이 4시간 30분(74.8㎞)으로 가장 길다.
서울 시내버스 27개 장거리 노선 현황. 운행거리가 60km 이상이거나 운행시간이 4시간이상인 버스 노선 27개. 서울시 제공, 서울신문 분석
서울 시내버스 27개 장거리 노선 현황. 운행거리가 60km 이상이거나 운행시간이 4시간이상인 버스 노선 27개.
서울시 제공, 서울신문 분석
서울시는 지난 2016년 ‘제3차 서울특별시 대중교통계획’을 발표하면서 기사들의 피로도를 고려해 27개 장거리 버스 노선을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조정하겠다고 밝혔지만 계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07번, 108번, 150번, 461번 등 11개 노선의 운행시간은 오히려 늘었고 362번, 202번, 542번 741번 등 4개 노선의 운행거리와 시간은 4년 전과 동일하다.

서울시는 버스를 이용하는 시민들의 편익을 고려해 장거리 노선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버스정책과 관계자는 “노선 단축 방안을 내놓으면 ‘종점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데 왜 중간에 갈아타야 하느냐’는 식의 민원이 쏟아져 노선 변경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신축 대형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쳐 기존 버스 노선이 연장되기도 했다. 강남구 일원동이 종점이었던 4412번(현 4312번)은 9510세대가 거주하는 송파구 헬리오시티까지 연장됐다. 거주민들이 강남까지 한 번에 가는 노선을 만들어달라고 지자체에 거듭 민원을 넣었기 때문이다.
장거리 운행으로 버스 기사들이 고통받고 있는 742번 버스가 29일 오전 출근 시간에 서울 서초구 서리풀터널을 진입하고 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장거리 운행으로 버스 기사들이 고통받고 있는 742번 버스가 29일 오전 출근 시간에 서울 서초구 서리풀터널을 진입하고 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서울시로부터 경영평가를 받고 그에 따라 버스 수익금을 차등으로 지급받는 버스 회사들은 서울시의 노선연장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버스운영업체 평가 가·감점 항목에는 ‘시정협조도’가 50점이나 배정돼 있다. 만약 버스 회사가 평가점수 50점을 다시 얻으려면 버스 5대를 감차하거나 부대사업 수입 1억원을 증대해야 할 정도로 큰 배점이다. 선진운수 관계자는 “시정에 협조하지 않으면 평가 점수가 떨어져 지원금이 줄어든다”며 “회사가 버스 기사의 과로를 강요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교통 전문가들은 서울시가 버스기사를 위한 건강·안전대책을 마련하고 장거리 노선 단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경우 한양대 교통물류공학과 명예교수는 “준공영제의 최종 책임자인 서울시가 버스 기사를 위한 복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장거리 노선을 쪼개고 최소한 회차 지점에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정체가 심한 구간에 버스전용차로를 짓는 등 인프라를 확대해야 한다”면서 “인천 영종도처럼 일정 인원 이상이 모이면 앱으로 버스를 호출하는 ‘수요응답형’ 버스가 장거리 노선 단축의 보완책이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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