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급심 “권리남용” 배척 잇따라… 대법원 판례에 영향줄지 관심
국가 범죄의 희생자들이 국가의 인권침해 사실을 밝히고도 피해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나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이 국가가 조직적으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규명해도, 정부가 “피해자가 소송을 늦게 냈다.”며 손해배상을 거부하고 대법원이 이 같은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49년 12월24일 육군 제2사단이 공비를 토벌한다며 경북 문경 석달마을 주민을 무차별 사살했다. 전체 마을주민 127명 중 86명이 숨졌으며, 사망자 70%가 힘 없는 어린이·노인·여성이었다. 당시 군은 게릴라가 국군으로 위장해 학살을 저질렀다고 보고하고 사건을 은폐했다. 그러나 2007년 6월 과거사정리위는 “국군이 비무장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라고 실체를 규명했다. 이에 따라 채의진(71)씨 등 유족 4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은 “소멸시효가 지났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 같은 판결은 대법원이 ‘국가 범죄’를 개인간 분쟁과 똑같이 다루는 데서 비롯된다. 대법원은 국가가 반인권적 범죄를 저지르고도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며 배상을 거부하는 것을 권리남용으로 보지 않는다. 1996년 12월 삼청교육대 사건이나 지난해 6월 거창 양민학살사건 또한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을 받아들여 국가가 배상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했다.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을 배척한 수지김 사건과 서울대 최종길 교수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은 국가가 상소를 포기해 대법원 판례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하급심에서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리고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늦게라도 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한국전쟁 초기에 군·경에 집단 학살된 울산 보도연맹 희생자 407명의 유족이 낸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은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국가가 20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1994년 5월 군부대에서 숨진 손모(사망 당시 19세) 이병의 유족이 낸 소송에서 수원지법 성남지원은 군 의문사 사건으로는 처음으로,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을 배척했다. 1965년 논산 훈련소에서 구타로 사망한 고모(사망 당시 22세)씨 유족이 낸 소송에서도 “국민의 생명을 침해하고 증거를 은폐한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판단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2009-02-23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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