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천당 불신지옥’, ‘예수 믿고 천당가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한국 개신교계가 주관하는 크고 작은 행사에선 이런 말과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지하철 열차 안을 비롯, 대중이 모이는 많은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 말들은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고 다른 모든 형태의 종교나 사상은 이 구원의 절대진리에서 배제됨을 알게 모르게 암시한다. 바로 한국 주류 개신교의 교리를 드러내는 문구들인 것이다.
기독교에서 구원과 관련한 입장은 대체로 세가지로 요약된다.‘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전통의 보수 배타주의와 ‘예수 안에서만 구원이 있지만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다.’는 포용주의, 그리고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다원주의이다.
이 가운데 비록 교회 안에는 속해 있지 않지만 마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는 삶을 사는 익명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포용주의나, 다른 종교에 구원의 길을 여는 다원주의는 배타주의와는 차별화된다.
한국 개신교계의 경쟁적 해외선교의 문제는 바로 이 배타주의에 익숙한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한계에 큰 원인이 있다.‘예수가 구원의 길이며 예수를 만나게 하는 것이 바로 선교의 궁극적 목표’라는 인식은 현지인, 특히 ‘미전도지역인’들의 신앙을 바꿔놓으려는 헌신으로 이어지고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도 비켜나있지 않다.
●한국 개신교계 80%가 배타주의
지난해 아프간에서 1300여 개신교도가 참가한 가운데 이벤트를 벌이려다 출국조치 당한 한 선교사가 홈페이지에 남긴 글 “아프간을 장악한 어둠의 권세는 무너져 내릴지어다.”는 속내야 어쨌든 공격적 선교의 방향성을 보여 준다. 봉사활동을 표방한 활동도 궁극적으로 전도와 선교라는 질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에 힘을 실어 주는 예이다. 안타깝게도 순수한 열정을 갖고 전도에 나선 많은 선교사와 신자들의 뜻까지도 가리게 한다.
구원과 관련한 신학과 실천이론을 볼 때 지금 한국 개신교계의 80%가 배타주의에 속한다는 데 전문가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현지의 문화와 전통을 고려해 토착화와 교화에 주력하는 유럽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나 미국 기독교의 절반을 차지하는 포용과 다원주의 선교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제 신학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포용주의와 다원주의를 수용하지 않는 한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의 참극은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개신교 신학자들 가운데 보수 교리에 반대하며 선교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적지 않다.“배타적 구원관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필요에 의해 도입된 교리여서 현대사회에서는 반드시 재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나 “공격적 선교방식은 세상을 다양하게 창조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독교인 스스로 제한하고 파괴하며 획일화하는 신앙적 범죄행위”라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심지어는 “한국 교회 교우들이 진정으로 섬기고 따라야 할 분은 하나님이고 예수님이지 교회와 목사가 아니다.”라든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에 가두는 교리주의자들은 종교를 팔아 잇속을 챙기는 장사꾼”이라는 말도 등장한다.
●“2000년전 잘못된 원시교리 얽매어”
이들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는 구원관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교회의 진정한 역할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인도하려 한 게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구원의 의미로 당시의 율법과 로마 식민지상태의 처절한 가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 삶을 뜻했지만 후대에 교회 조직이 생존을 위해 공격적인 선교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구원관이 개선을 위한 대안과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데 있다.
대형교단이 설립한 신학교에서 공부한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결국 교단의 교리에 빠질 수밖에 없고 취업 등 사회활동에서도 영향받는 상황에서 이런 구원관과 입장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2년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으로 감리교단에서 출교된 변선환 목사는 지금까지도 복권되지 않고 있다.
류상태 목사(종교자유정책연구원 지도위원)는 “2000년 전의 잘못된 원시교리에 얽매인 교회와 신자들을 더이상 무지의 감옥 속에 가두어선 안 된다.”며 “이번 피랍사태는 신학자들에게 해외선교와 구원의 방향성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큰 숙제를 남긴 계기”라고 말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기독교에서 구원과 관련한 입장은 대체로 세가지로 요약된다.‘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전통의 보수 배타주의와 ‘예수 안에서만 구원이 있지만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다.’는 포용주의, 그리고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다원주의이다.
이 가운데 비록 교회 안에는 속해 있지 않지만 마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는 삶을 사는 익명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포용주의나, 다른 종교에 구원의 길을 여는 다원주의는 배타주의와는 차별화된다.
한국 개신교계의 경쟁적 해외선교의 문제는 바로 이 배타주의에 익숙한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한계에 큰 원인이 있다.‘예수가 구원의 길이며 예수를 만나게 하는 것이 바로 선교의 궁극적 목표’라는 인식은 현지인, 특히 ‘미전도지역인’들의 신앙을 바꿔놓으려는 헌신으로 이어지고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도 비켜나있지 않다.
●한국 개신교계 80%가 배타주의
지난해 아프간에서 1300여 개신교도가 참가한 가운데 이벤트를 벌이려다 출국조치 당한 한 선교사가 홈페이지에 남긴 글 “아프간을 장악한 어둠의 권세는 무너져 내릴지어다.”는 속내야 어쨌든 공격적 선교의 방향성을 보여 준다. 봉사활동을 표방한 활동도 궁극적으로 전도와 선교라는 질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에 힘을 실어 주는 예이다. 안타깝게도 순수한 열정을 갖고 전도에 나선 많은 선교사와 신자들의 뜻까지도 가리게 한다.
구원과 관련한 신학과 실천이론을 볼 때 지금 한국 개신교계의 80%가 배타주의에 속한다는 데 전문가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현지의 문화와 전통을 고려해 토착화와 교화에 주력하는 유럽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나 미국 기독교의 절반을 차지하는 포용과 다원주의 선교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제 신학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포용주의와 다원주의를 수용하지 않는 한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의 참극은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개신교 신학자들 가운데 보수 교리에 반대하며 선교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적지 않다.“배타적 구원관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필요에 의해 도입된 교리여서 현대사회에서는 반드시 재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나 “공격적 선교방식은 세상을 다양하게 창조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독교인 스스로 제한하고 파괴하며 획일화하는 신앙적 범죄행위”라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심지어는 “한국 교회 교우들이 진정으로 섬기고 따라야 할 분은 하나님이고 예수님이지 교회와 목사가 아니다.”라든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에 가두는 교리주의자들은 종교를 팔아 잇속을 챙기는 장사꾼”이라는 말도 등장한다.
●“2000년전 잘못된 원시교리 얽매어”
이들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는 구원관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교회의 진정한 역할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인도하려 한 게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구원의 의미로 당시의 율법과 로마 식민지상태의 처절한 가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 삶을 뜻했지만 후대에 교회 조직이 생존을 위해 공격적인 선교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구원관이 개선을 위한 대안과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데 있다.
대형교단이 설립한 신학교에서 공부한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결국 교단의 교리에 빠질 수밖에 없고 취업 등 사회활동에서도 영향받는 상황에서 이런 구원관과 입장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2년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으로 감리교단에서 출교된 변선환 목사는 지금까지도 복권되지 않고 있다.
류상태 목사(종교자유정책연구원 지도위원)는 “2000년 전의 잘못된 원시교리에 얽매인 교회와 신자들을 더이상 무지의 감옥 속에 가두어선 안 된다.”며 “이번 피랍사태는 신학자들에게 해외선교와 구원의 방향성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큰 숙제를 남긴 계기”라고 말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2007-09-01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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