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첫 여성대통령 노리는 박근혜 누구인가

사상 첫 여성대통령 노리는 박근혜 누구인가

입력 2012-07-10 00:00
업데이트 2012-07-1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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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공주→선거의 여왕→대권주자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 애국심ㆍ원칙ㆍ신뢰로 성장..부친의 그늘ㆍ불통 이미지 약점

1979년 10ㆍ26사태로 그는 아버지마저 잃었다. 27일 새벽1시 박 전 대통령의 유고 소식을 처음 전해들었을 때 그의 첫 마디가 “전방의 상태는 괜찮습니까”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국가안보가 DNA처럼 피 속에 박혀 나온 조건반사적 얘기”라고 회상했다.

신당동 옛집으로 돌아온 후 야인(野人)으로 보낸 18년은 단편적으로 알려질 뿐이다. 그는 “은둔은 아니었고 평범한 일반 시민으로 살았다.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책도 많이 읽고 사색도 하고 마음을 풀 길이 없어 글도 썼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밥이 모래알 같고 먹어도 맛을 모르겠고 TV에서 우스운 장면을 봐도 웃음이 나질 않았다”며 10ㆍ26 직후의 충격을 표현했다.

당시 ‘박정희 체제’에서 혜택받았던 이들의 배신에 따른 고통도 컸던 듯 하다.

그는 저서인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에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배신하는 사람의 벌은 다른 것보다 자기 마음 안의 무너뜨려서는 안되는 성(城)을 스스로 허물어뜨렸다는 점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육영재단 이사장, 영남대학교 이사장, 한국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면서 선친의 업적과 역사적 정당성을 외롭게 주장했다.

◇IMF사태로 정치 입문..위기에 강했던 당(黨)의 구원투수 = 그는 46세인 1998년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정치인으로서 첫 주목은 2000년 당 총재 경선 때 받았다. 경선에서 이회창 전 총재에 이어 부총재로 당선됐지만 이듬해 ‘이회창 대세론’에 반발해 당 개혁안을 요구하며 탈당, ‘미래연합’을 창당하는 강단을 보였다.

이 시기에 그는 방북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남북한 현안을 협의했다.

2002년 재입당한 그가 ‘정치인 박근혜’로 도약한 것은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였다. 불법대선자금 수수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침몰 직전이던 2004년 3월 당대표를 맡았다. 국민 앞에 과거를 반성하고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의미에서 그는 ‘천막당사’를 감행했다.

그해 치러진 4.15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이 의석을 싹쓸이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121석으로 개헌저지선을 확보했다.

박 전 위원장은 이후 2년3개월간 당대표로 재임하면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5차례의 국회의원 재ㆍ보선과 지방선거에서 완승해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 대표 시절, 그는 여권이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학법 개정을 시도했을때 앞장서 저지했다. 2006년 지방선거 지원유세 때 테러를 당했으나 병원 입원 중 “대전은요”라는 한마디로 선거의 판도를 바꿔놓을 정도로 그의 짧은 한마디가 정국을 뒤흔들었던 적이 많았다.

◇첫 대권도전서 고배..‘원칙과 신뢰정치’로 다시 유력주자로 = 대권주자 반열에 오른 그는 2007년 17대 대선출마를 선언했으나, 사상 유례없는 대혈전이었던 8월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 석패했다. 그는 패배에 승복하고 대선에서 이 후보 지원유세에 나섰다.

이듬해 ‘이명박 정권’이 출범했으나 경선 과정의 극심한 갈등으로 화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치적 혹한을 맞은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소극적 지원의 의미로 정치적 ‘칩거’를 선택했다.

정치적 언행을 최대한 자제한 침묵의 행보였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60여명의 친박(친박근혜)계와 더불어 입법저지를 할 수 있는 비주류의 세력을 형성했다.

그는 2009년 미디어법 입법에 반대하며 여권 주류와 한차례 갈등한데 이어, 이듬해 정부의 세종시 수정 추진에 반대함으로써 이 대통령과 정면충돌하는 위기를 감수했다. 세종시 원안고수는 그를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려하는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으로 각인시켰다.

그는 18대 대선을 앞둔 4ㆍ11총선에 즈음해 대권행보를 시작하려 했지만, 2011년 10ㆍ26 서울시장 보선 패배 후 잇단 악재로 한나라당 지도부가 사퇴하자 비대위원장으로 조기등판, 수렁에 빠진 당을 또다시 떠안았다.

그는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며 새누리당으로의 당명개정 등 강도높은 쇄신책을 단행한 끝에 4ㆍ11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과반을 넘는 151석을 거머쥐며 또한번 위기수습 능력을 과시했다.

애국심, 철저한 안보관, 국가ㆍ국민에 대한 사랑은 그가 가진 덕목으로 꼽힌다. 부정부패와 불법에 단호하고, 한번 옳다고 결단한 것을 번복하지 않은 결연함도 그의 장점들로 언급된다.

그러나 원칙을 고수하면서 수반되는 소통불능의 이미지는 대선가도에서 넘어서야할 장벽이다.

또한 독재, 인권탄압, 비민주화 등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단면과 선친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는 새로운 비전과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도 그가 안고 있는 무거운 숙제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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