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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 WHAT]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과 상담하다

[WHO & WHAT]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과 상담하다

입력 2011-04-12 00:00
업데이트 2011-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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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당신은 일중독, 우울증 초기 증상… ‘이기적인 게 가장 이타적’ 깨달아야”

가상 인터뷰 ‘WHO & WHAT’의 이번 주 주인공은 신경정신과를 찾은 스파이더맨이다. 국내 최고의 영화 심리분석 전문가로 꼽히는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의 시선을 통해 모두의 선망을 사는 슈퍼히어로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김 원장은 “스파이더맨의 고민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남성들, 특히 가장으로서 안고 있는 강박관념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고 했다.

환자번호 20110412-02.

‘똑똑.’

진료실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서는 백인 남자를 처음 봤을 때,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자리에 앉은 후에도 그는 끊임없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미국 뉴욕에서 온 프리랜서 사진작가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도 좀체 이름은 얘기하지 못했다. 신경정신과를 처음 찾은 게 분명하다.

저널리즘이 뭔지도 모르면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는 편집장. 그에게 굽실거려야 간신히 단칸방에서나마 생활을 이어 갈 수 있다고 했다. 하나뿐인 친구와 한동안 철천지 원수로 지냈던 얘기, 브로드웨이에서 배우로 일하는 여자 친구와의 갈등…. 이 남자, 뭔가 특별하다. 숨어 있는 뭔가를 계속 억누르는 것이 느껴진다.

갑자기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달라지며 자리에서 움찔하는 게 아닌가. 번득이는 눈빛을 보자 불현듯 남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런 유명인이 내 진료실에 앉아 있다니. 피터 파커. 지난 수십년간 전 세계 수억명의 가슴을 설레게 한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그를 몰라보다니….

세상에 든든한 믿음을 주어야 할 사람이 실제로는 숱한 고민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상담을 하고 환자를 달래는 것이 내 직업이라 해도 그렇다. 일중독에 우울증 초기 증상. 하루에도 몇 명씩 병원을 찾는 현대 남성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약을 처방할 정도는 아니지만 혼자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많아 보인다. 간호사 말로는 추가 상담은 예약하지 않았다고 했다. 스크린이 아닌 현실에서 그를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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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
김상준 원장 당신을 만나 보고 싶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환자와 의사로 마주하니 부담스럽다. 일단 성장과정 얘기를 해 보자.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삼촌과 숙모 밑에서 자란 것으로 알고 있다.

피커 파커 맞다. 지금은 삼촌까지 돌아가셔서 숙모만 계신다. 이런 성장배경이 문제가 되나.

김 원장 불우한 성장배경은 슈퍼히어로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브루스 웨인(배트맨)은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고, 클라크 켄트(슈퍼맨)는 아예 외계에서 왔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페르세우스 등을 봐라. 전부 신의 아들이지만 버림받아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란 영웅들이다. 이런 부분이 콤플렉스의 원인이다. 영웅은 다시 버려지거나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쓸 수밖에 없다. 버려진 것은 수동적인 것이지만, 인정받고 싶어 하는 행위는 능동적이니까 더 만족을 느끼는 거다.

파커 슈퍼히어로뿐 아니라 다른 일반인들도 불우한 성장배경을 갖고 있으면 마찬가지라는 얘기로 들리는데.

김 원장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사람, 학력이 낮은 사람 등의 경우 콤플렉스가 성공의 동기가 되기는 하지만 그 결과 불필요하게 나서게 되는 면이 많다. 학력이 모자라면 최고경영자 과정 같은 경력을 몇 개씩 쌓고, 향우회나 동문회 등에도 앞장선다. 그러다 보면 어릴 적에는 불가항력으로 어쩔 수 없었던 자기를 둘러싼 요소들을 조절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파커 난 우연찮게 (슈퍼 거미에게 물리면서) 초능력을 갖게 됐다. 성장배경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내가 갑자기 능력을 갖게 돼서 더 적응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김 원장 영웅의 고민은 그들의 능력이 외적인 부분에만 국한되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내면까지 인간을 초월한 슈퍼히어로를 본 적이 있나. 결국 자신의 내면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기 때문에 갈등이 시작된다. 하나 더 보태자면 당신이 거미에게 물린 것 자체가 정신분석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당신 속에 숨어 있던 본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으니 말이다.

파커 내가 누군가를 구하고 악당을 이기면 사람들이 열광한다. 하지만 경찰이 그러면 당연하게 여긴다. 왜 그런가.

김 원장 냉정하게 얘기하면 당신의 방식이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악당을 처벌하는 방식은 현실에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당신은 법의 잣대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야만적인 폭력을 사용한다. 본인이 할 수 없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당신이 대신 해 주기 때문에 열광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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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악당이 없으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끊임없이 등장한다. 심지어 내 가장 친한 친구조차 악당이 돼서 나를 괴롭혔다.

김 원장 네오(매트릭스)의 기계군단, 배트맨의 조커를 봐라. 안티 히어로가 없는 슈퍼히어로가 어디 있는가. 가까운 사람이 악당으로 등장하면 더 갈등이 커지고, 영웅의 괴로움은 더 심해진다. 그게 바로 정신분석학자 칼 융이 말한 ‘그림자’다. 영웅이 맞서는 악당은 사실상 그 자신의 그림자다. 어떤 사람들은 슈퍼히어로 영화가 지나치게 선과 악을 이분화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애초부터 선과 악이 하나처럼 붙어다니기 때문이다. 신념을 가졌던 정치인이나 순진하던 기업가들이 나중에 누구보다도 탐욕스럽게 변질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니체가 “악과 싸울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악과 닮아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을 추구할수록 악도 같이 커질 수밖에 없다.

파커 그럼 나도 언젠가 변질된 악인이 된다는 얘기인가. 고민을 해결하러 왔는데, 걱정만 더 늘어 간다.

김 원장 감독이 당신을 영원히 매장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면 절대 그럴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라. 다만 ‘선하면 된다’는 슈퍼히어로의 절대 가치는 재고해 봐야 한다. 당신 같은 영웅들은 본인들이 선이라고 생각하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매달아 놓든 죽이든 없애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나. 폭력적이고 전제주의적인 것에 맞서던 사람들이 뜻이 맞지 않는 동지를 제거하거나 더 사악하게 다루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파커 나처럼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고민은 좀처럼 남들이 들어주지 않는다. 도대체 내가 가진 능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김 원장 슈퍼히어로의 가치가 소위 말하는 ‘남자들의 가치’라는 게 문제의 근본이다. 사회적으로 보면 여자들의 전통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많다. 미모나 성격 같은 부분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의 변화는 있지만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반면 직업, 학력, 배경 등 남자들이 평가받는 기준은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다. 갑자기 초능력을 갖게 된 당신이 갑자기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여성적 가치가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경우는 없지만, 남성적 가치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바로 그 힘이 자신의 존재 근거이자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이유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점점 불안해지는 것이다. 일반적인 남성들이 일에 점점 더 빠져들고, 끊임없이 지키기 위해 더 매달리는 걸 보면 결국 당신의 고민은 일반인의 고민과 마찬가지다.

파커 난 남의 일은 다 해결해 주면서 정작 내 여자 친구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한심한 영웅이다.

김 원장 영웅의 정체성은 악당을 퇴치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화기애애한 가족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무가 크면 그늘이 짙을 수밖에 없다. 영웅이 남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면 애쓸수록 주변 사람은 소외받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구해야 할 사람들 사이에 가족이 끼여 있는데 가족을 먼저 구하고, 나머지가 죽으면 영웅이 아니지 않은가. 결국 일반적인 사람과 영웅 사이에는 감정적인 교류 자체가 불가능하다고도 볼 수 있다.

파커 그럼 난 여자 친구를 사귀거나 가족을 꾸리는 건 아예 시도를 하지 않는 게 좋은가. 내 인생의 낙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

김 원장 결국 깨달음이 필요한 문제다. 현실의 슈퍼히어로들을 보자. 항상 모든 것을 해낼 수 있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귀농을 한다든가, 욕심을 줄이고 요직에서 물러난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보통 갑자기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몰락한 후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익숙한 당신 같은 사람들은 자기애적 성격 장애로 판단할 수 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사회에 기여하고 그걸 알아줘야 만족을 느끼는데 그게 사실은 본인한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특별한 계기 없이 깨닫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당신 같은 환자들에게는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인 것’이라는 원론적인 얘기밖에 처방이 없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돌보면 주변 사람들도 모두 행복해진다.

글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사진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김상준 원장은

정신과 전문의로 연세대 의과대학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6년 국내 처음으로 ‘영화’를 정신과적인 시각으로 해석한 ‘프로이트와 영화를 본다면’으로 영화 읽기의 새 장을 열었다.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영화 길라잡이와 고정 패널로 출연했다. ‘신화로 영화 읽기, 영화로 인간 읽기’, ‘내가 뭐 어때서’ 등을 출간했다.

서울신문은 매주 1회 독특한 포맷의 가상 인터뷰 [WHO&WHAT(후 앤드 왓)] 1개면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반 신문기사로는 다루기 힘든 동서고금의 지식과 역사의 정수들을 만남 또는 대담의 형식을 통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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