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나 영화에서 때때로 주인공보다 빛나는 조연이 등장한다.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가 주도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서 안규리(安圭里·50) 서울대 의대 신장내과 교수가 보여준 역할이 이같은 ‘빛나는 조연’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 좋아 의사의 길을 선택했고, 눈 앞의 환자가 아닌 미래의 환자를 위해 과학자로 나서게 됐다는 안 교수.‘50살 소녀의 수줍은 고백’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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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리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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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리 서울대 의대 교수
●사람이 좋아 선택한 의사
안 교수는 현재 신장질환 및 면역학 분야에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한대석 교수와 함께 국내 최고의 ‘명의’로 꼽힌다. 이런 그가 의사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안 교수는 “어린 시절 아버님 제자들이 집으로 많이 찾아 왔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졌으며, 결국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의사의 길을 선택한 계기가 됐다.”라고 밝혔다.
안 교수는 이와 관련한 일화도 소개했다. 안 교수의 부친은 6대 상공부장관을 지낸 뒤 수십년간 대학강단에 섰던 고 안동혁 박사다. 이 때문에 설날이면 고 안 박사의 대문을 두드리는 제자들이 200명이 넘었다는 것. 고 안 박사는 이처럼 많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애지중지하던 책을 팔기도 했으며 이때는 한참을 홀로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아버님께서 과학자가 되라는 말씀을 꺼내지는 않으셨지만 과학자로서의 멋진 삶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면서 “하지만 과학자로서의 삶에 대한 호감은 의사가 된 이후 환자들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내 신부전증(콩팥기능저하증) 환자는 80여만명, 이중 신장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는 중증 환자는 3만 90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신장질환 전문가인 그는 신부전증 환자들이 장기 이식을 받지 못해 죽음의 위기에 처한 경우를 수없이 지켜봐야 했다.
안 교수는 “당뇨병과 고혈압 등의 합병증으로 신부전증 환자가 늘고 있지만 장기 이식이 쉽지 않아 완치율은 20%에도 못 미치는 실정”이라면서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해결해 보고자 면역학 연구에 나선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주인공보다 빛나는 조연
새로운 장기 이식 연구에 전념하던 안 교수가 황 교수팀에 가담한 것은 지난 2002년. 황 교수팀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당뇨병과 백혈병 등 난치병 치료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환자를 상대로 임상시험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장기 이식 후 면역거부반응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이를 안 교수가 담당했다.
이 때문에 황 교수는 지난 5월 영국 런던에서 치료용 배아줄기세포 배양 성공 사실을 발표한 뒤 가진 귀국 기자회견에서 안 교수를 지목하며 “앞으로 연구방향을 쥐고 흔들 인물”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안 교수는 “이번 연구 성과에 대해 세계가 놀라고 있는 점은 배아줄기세포 성공 확률이 매우 좋아졌다는 것과 다양한 환자에게 실제 세포치료제로 사용할 가능성을 높였다는 것”이라면서 “고맙고 운 좋게도 황 교수를 만나 도움을 준 것만으로 행복해요.”라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무대의 전면이 아닌 뒤편에 서는 것을 꺼리지 않는 안 교수는 스스로를 ‘총무’ 체질이라고 밝힌다. 그는 “총무가 좋은 이유는 일을 마쳤을 때 뒷정리를 하면서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서포터가 제게 가장 잘 어울리고 편해요.”라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봉사는 젓가락 한벌 더 놓는 것”
안 교수는 이처럼 ‘안방마님’으로서의 역할을 ‘라파엘 클리닉’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라파엘 클리닉은 지난 1997년 4월 안 교수 주도로 서울대 의대 가톨릭 교수회 및 학생회가 참여해 설립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무료진료소다. 지금은 자원봉사자 수가 400여명에 달하고 이곳을 다녀간 외국인 노동자들이 6만명을 넘을 만큼 웬만한 종합병원에 맞먹는 규모로 커졌지만, 안 교수는 라파엘 클리닉에서 줄곧 총무직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안 교수는 환자 가운데 추가 진료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서울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 등 20여개 협력병원으로 이송,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협력 체계도 구축했다. 또 수술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환자들에게는 진료비 후원 등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고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안 교수는 지난 1986년부터 6년간 미국 스크립 연구소에서 연수를 하며 미국과 멕시코 접경지대에 있는 빈민진료소인 ‘멕시칸’에서 외국인 의사들과 함께 무료 진료봉사를 펼치기도 했다.
안 교수는 “학생들을 따라 농촌에 가서 배추를 심은 적이 있었는데 30분 만에 쓰러지고 말았다.”라면서 “이에 반해 의료 자원봉사는 차려진 밥상에 젓가락 한벌 더 놓는 것처럼 저에게는 어쩌면 단순하면서도 편안한 일”이라며 겸손해했다.
●데레사 닮은 퀴리, 퀴리 닮은 데레사
안 교수의 이름은 부친이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 박사와 같은 훌륭한 과학자가 되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이름이다. 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안 교수의 세례명은 ‘소화 데레사’이다.
특히 주변 사람들에게 안 교수는 3가지가 없는 ‘3무(無)교수’로도 통한다. 먼저 얼굴 표정이나 음성에서 구김이 없다는 것. 이 때문에 ‘소녀 같은 중년’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격의없는 대화로 환자나 제자들과 벽이 없으며 독신이다.
안 교수는 “보살펴야 하는 환자들, 아름다운 후배들, 미래의 환자들을 위해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으니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많다.”면서 “의사로서 꿈이 있다면 내 환자에게 충실할 수 있고, 나에게 찾아오지 못하는 환자들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희망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화장기 없는 얼굴을 대신하고,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우렁찬 외침을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수 있는 사람이 안 교수다.
그는 “지금까지 자유롭게 일했는데 (세상에 너무 알려져서)자연스러움이 없어질 것 같다.”면서 “언론이나 국민들께서 특정 과학자를 스타처럼 대접하기보다 과학자들이 클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줬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말을 맺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2005-06-1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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