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이슈] 수사기록 공개 공방

[클릭 이슈] 수사기록 공개 공방

입력 2005-03-15 00:00
수정 2005-03-15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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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A씨는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건설업자 B씨가 그에게 8000만원을 건넸다고 자백했기 때문이다.A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지만 사흘간 검찰에 불려가 꼬박 12시간씩 신문받았다. 검찰은 집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본인은 물론 가족 등 참고인 20여명에 대한 계좌추적을 실시하는 한편 통화기록도 조회했다. 이런 수사기록만 수백장에 이르렀다. 검찰의 기소로 법정에 선 A씨는 다시 한번 당황했다. 검찰이 수사기록을 법정에 제출하지 않아 변호인이 아무런 사전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상사건은 검찰이 수사기록을 법원과 변호인에게 제출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다. 검찰은 실제로 수사기록을 제출하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철거업자로부터 아파트 재개발과 관련해 1억 4000만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조합장 김모씨를 기소했다. 검찰은 1차 공판에서 관행을 깨고 수사기록을 제출하지 않았다.

재판이 시작되면 검찰은 수사기록을 법원에 넘긴 뒤 확정 판결 후 돌려받는다. 불기소·무혐의 사건기록은 검찰이 관리하고 있다. 이런 관행을 깨고 현재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만 기록을 제출하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 다른 지검으로 확산될 분위기다.

검찰이 수사기록을 내지 않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수사기록을 읽고 피고인이 증인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일이 일어나는 등 공소유지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또 수사기록에 등장하는 다른 관련자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도 이유다. 수사기록의 의존도를 낮추고 법정 진술과 증거로 유·무죄를 판단하자는 공판중심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법원의 잦은 영장 기각과 관대한 판결에 대한 불만이 숨어 있다.

검찰은 어떤 자료를 법정에 낼지, 제출한다면 언제 어떻게 공개할지 등 수사기록에 관한 모든 결정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재판에서 효과적으로 유죄를 입증하려면 피고인에게도 수사기록을 모두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검찰은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만을 선별해 법원에 제출하고 그밖의 수사기록은 유·무죄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으니까 판사도, 피고인도 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대검찰청은 이에 대해 일률적인 지침을 내려보내지는 않고 각 지검과 지청이 자체적으로 대응하도록 하고 있다. 대검 관계자는 “수사기록을 제출하지 않는 것은 공식적인 대검 입장은 아니고 일선 검사의 재량사항”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검 예규는 피고인이 수사기록 중 본인의 진술만 열람·등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형사소송법 개정안도 수사기록 전체가 아니라 검찰이 법원에 제출할 기록만 피고인에게 미리 공개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변호사들은 제3자가 아닌 피고인의 수사기록 열람을 막는 것은 위법이라고 주장한다. 한 변호사는 “원칙적으로 피고인의 개인 기록인 수사기록은 검찰이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집, 활용할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대한변호사협회도 피고인의 방어권 확보를 위해서도 수사기록 열람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피고인이 첫 재판에 섰을 때 검사는 이미 수개월간 사건을 파헤친 전문가지만, 피고인은 무방비 상태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변호인은 수사기록을 읽으며 사건을 분석, 허점을 찾아내 피고인을 방어해야 하는데 수사기록도 보지 못하면 방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소동기 변호사는 “증거수집 능력이 탁월한 국가기관이 유리한 증거만 법정에 제출하는데 개인이 맞서 이길 수 있겠느냐.”면서 “법원 제출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수사기록을 피고인과 공유해야 대등한 재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미국·독일도 피고인에게 원칙적으로 수사기록을 공개하고 있다. 김선수 변호사는 “수사기록은 무죄를 밝힐 자료가 될 수도 있다.”면서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하는 국가기관이 진실을 은폐한다는 의혹을 받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헌법재판소도 1997년 검찰이 수사기록의 열람을 이유 없이 거부한 것에 대해 “피고인의 신속·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며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서울중앙지법도 김씨 사건에서 검찰은 수사기록을 피고인에게 공개하라고 명령했다.

수사기록은 국가기관인 검찰이 국민의 세금을 받아 수집·작성한 공문서란 주장도 있다. 피고인 등 이해 당사자뿐 아니라 언론매체나 사회단체도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공개를 청구하면, 원칙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해석이다. 대법원은 “공개될 경우 국가 안보나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는 구체적 설명 없이 단순한 가능성이나 주관적 추측으로 검찰이 수사기록의 공개를 거부해선 안 된다.”고 판시하고 있다.

실제로 5·18 광주민주화운동,KAL858기 사건기록이 지난해 공개됐다. 방송사의 청구로 지난달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미수사건 수사기록도 빛을 봤다. 지난 1월 서울고법은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수사기록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검찰의 공개 거부 결정은 대부분 행정소송을 통해 뒤집혔다.

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2005-03-15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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