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운수 안 좋은 날

[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운수 안 좋은 날

심재억 기자 기자
입력 2004-02-23 00:00
수정 2004-02-23 07:55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14
상상력은 남에 대한 배려,존중,친절,겸손 등 우리가 남에게 바라는 심성의 원천이다.그리하여 좋은 상상력은 길바닥의 걸인도 함부로 능멸할 수 없게 한다.

아침 신문을 뒤적이다가 원로배우 백성희의 사진이 크게 난 것을 보았다.표정은 기사에서 밝히고 있는 연세를 믿을 수 없을 만큼 젊고 품위 있고 당당해 보였지만 손은 보통의 할머니처럼 거칠고 늙어보였다.나는 그 사진으로 그의 전체를 본 것처럼 느꼈고 존경하는 마음과 친밀감으로 흐뭇해졌다.인상적인 손 때문이었을까,달포도 넘게 전에 전철 안에서 당한 일이 생각났다.너무 창피해서 내 자식들한테도 안 하고 묻어 두었던 얘기다.

노약자 석에 앉아 있는 내 옆자리에 어린이를 손잡고 탄 엄마가 앉았다.네댓살 가량 돼 보이는 귀여운 아이가 내 얼굴은 쳐다보지 않고 내 손만 유심히 바라보았다.그러다가 마침내 말을 걸어왔다.‘할머니 손엔 왜 이렇게 주름이 많아?’ 당돌한 질문이지만 귀엽기도 해서 성의 있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넌 내가 할머니인 걸 어떻게 알았어?’ ‘이렇게 주름이 많으니까.’ ‘그래 맞았어.오래 살면 남들이 할머니라는 걸 알아보라고 주름이 생긴 거야.아줌마나 언니들하고 헷갈리지 말라고.’ 아이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다음에는 손등에 푸르게 내비치는 힘줄에 대해서 물었다.‘이건 힘줄인데 네 몸에도 있지만 예쁜 살 속에 숨어서 안 보이는 거야.주사 맞을 때나 필요한 건데 아이들은 주사 맞기 싫어하잖아.그래서 꼭꼭 숨어 있는데 늙으면 주사 맞을 일도 자주 생기고,주사 맞는 걸 좋아하니까 자꾸 겉으로 나오나봐.’ 말대꾸를 해주니까 아이는 계속해서 이것저것 묻고 또 물었다.나도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대답했다.우리는 어느 틈에 서로 죽이 잘 맞는다는 걸 느끼고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그쯤 되자 아이는 나하고 충분히 친해졌다고 믿은 것 같다.다시 내 손에 관심을 보이더니 내가 끼고 있는 반지의 알을 손가락으로 만져보면서 이 반지 나 주면 안돼? 하고 물었다.나는 웃으면서 반지를 빼려고 했다.물론 반지를 그 아이에게 주려고 그런 건 아니다.그런 어리광을 부려도 될 만큼 그 반지는 아이 눈에도 만만해 보이는 반지였고,실제로도 비싼 반지가 아니지만 나에게는 추억이 깃든 소중한 건데 아무리 귀엽더라도 오다가다 만난 아이에게 빼주겠는가.나는 일단 아이 손가락에 끼어보게 할 작정이었다.끼어보면 보나마나 헐렁할 테고 그러면 이건 네 손가락에 안 맞으니까 네 것이 아니잖니? 하면서 도로 빼 가지면 알아들을 아이지 그래도 막무가내 떼를 쓸 아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서로 알아볼 만큼 우리는 친해져 있었다.또 그 반지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지라는 걸 나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우리 손녀도 어렸을 때 그 반지만 보면 할머니 그 반지 얼마짜리 뽑기에서 뽑았어?라고 물어보곤 했더랬다.그때만 해도 동네 문방구 앞에는 100원짜리나 500원짜리를 넣고 돌리면 내용물이 빙글빙글 돌다가 동그란 게 하나 굴러 떨어지는데,까보면 사탕이나 반지나 열쇠고리 같은 싸구려 장난감이 들어있곤 했다.그걸 뽑기라고 했다.그만큼 아이 눈에 만만해 보이는 반지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일단 끼어보게 하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아이 엄마가 아이 팔을 거칠게 낚아채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정거장도 아닌데 출입문 쪽으로 아이를 끌고 가면서 중얼거렸다.보자보자 하니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 다음 말은 알아듣지 못했다.나잇살이나 처 먹어가지고였는지도 모르겠다.모욕감 때문에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전동차가 멎자 모자는 황급히 내렸다.아이가 나를 자꾸 돌아보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웃는 얼굴로 배웅할 수 없었다.그 역은 실은 내가 내릴 역이었지만 내리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뿐 아니라 식성,취미 등에도 U턴 현상 같은 게 일어나 옛날 것만 다 좋은 것 같고 마음이 통하는 것도 우리가 길러낸 30,40대보다는 어린이가 편하다.특히 오늘의 주역인 30,40대의 본데없음과 상상력 결핍은 우리가 저들을 어떻게 길렀기에 저 모양이 되었나,죄책감마저 들게 한다.상상력은 남에 대한 배려,존중,친절,겸손 등 우리가 남에게 바라는 심성의 원천이다.그리하여 좋은 상상력은 길바닥의 걸인도 함부로 능멸할 수 없게 한다.
2004-02-23 47면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해리스 vs 트럼프 승자는?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민주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공화당)은 지난 10일(현지시간) 105분가량 진행된 대선 후보 TV 생방송 토론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불꽃 튀는 대결을 했습니다. 양 측은 서로 자신이 토론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토론에서 누가 우세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카멀라 해리스
도널드 트럼프
잘 모르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