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官奴 전락’ 야사와 달리 공주 신분 유지 드러나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된 남편과 동생 단종을 비명에 잃은 경혜공주(敬惠公主·1436~1473)가 죽기 직전에 유일한 혈육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 준 문서, 분재기(分財記)가 발견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은 최근 해주 정씨 대종가에서 제공받은 1300여 점에 이르는 고문서에서 ‘경혜공주인’(敬惠公主印)이라는 붉은색 도장이 찍힌 분재기를 확인했다고 24일 밝혔다.가로 66㎝, 세로 70.5㎝인 이 분재기는 성화(成化·명나라 헌종의 연호) 9년(1473년) 12월 27일 유일한 혈육인 정미수(鄭眉壽·1455~1512)에게 재산을 나눠 준 내용을 담았다.
문서에서 공주는 “내가 불행히 병이 들어 유일한 아들인 미수가 아직 혼인도 못 했는데 지금 홀연히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며 “노비는 갑작스러운 사이에 낱낱이 기록해 줄 겨를이 없어 정선방(貞善坊·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8방 중의 하나)에 있는 가사(家舍·집)와 통진(지금의 경기 김포시)에 있는 밭과 땅을 먼저 허락해 준다(물려준다).”고 적었다. 아울러 공주는 정선방에 있는 집은 자기가 죽은 뒤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어 자손에게 전하고 오래도록 지니고 살라고 당부했다. 경혜공주는 분재기를 작성하고 사흘 뒤인 12월 30일 별세했다.
문서 작성에는 문종의 서녀인 경숙옹주(敬淑翁主·1439~?)의 남편 반성위(班城尉) 강자순(姜子順) 등 증인으로 참여한 3명의 수결(手決·서명)이 있다.
한편 이번 분재기를 통해 경혜공주가 순천이나 장흥의 관노(官奴)가 됐다는 조선 후기 일부 문집이나 야사의 기록과는 달리 죽을 때까지 공주 신분을 계속 유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미수는 이후 중종반정에 참여해 ‘정국공신’이 돼 가문을 일으켰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2012-07-25 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