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재주 없이 벼슬했으니 선배들에게 고기·담배 바치라”
“새로 온 놈[新鬼] 양정(暘鄭·놀리기 위해 성과 이름을 뒤집음)은 듣거라! 생각컨대 넌 별 볼일 없는 재주로써 외람되게도 귀한 벼슬길에 올랐겠다.(중략)거위,담배,돼지고기,닭고기 등을 즉각 내어와 우리에게 바치도록 하라.선배(先進)들 씀.”●선배들의 탄압 벗어나려면 대접해야
18세기 무렵 조선시대 정양(鄭暘)이란 사람이 신참 하급 관리로 배속받은 뒤 선배들을 접대하기 위해 가진 일종의 ‘신고식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작성한 문서다.불콰하게 취한 듯 글씨는 삐뚤빼뚤하다.문서 마지막에 선배 세 사람은 각자 ‘일심결(一心決·일종의 사인)’을 남겼다.후배를 동료로 받아들이기 전 마지막 통과 의례로 볼 수 있다.선배들의 장난끼와 후배의 곤혹스러워함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토지박물관은 조선시대 관가에서 횡행했던 면신례(免新禮·신참딱지를 떼는 의식)를 기록한 면신첩 2점을 10일 공개했다.지금까지 면신례 관련 자료로는 2004년 경기도 화성시에서 공개한 정조 시대 ‘김종철 면신첩’이 유일했다.
‘정양의 면신첩’은 면신례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반면 정확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그러나 또 다른 면신첩인 ‘면신입안(免新立案)’은 작성 연대를 정확히 기록하는 등 비교적 공식문서 형식을 갖췄다.
●또 다른 면신례선 신참을 벌레에 비유
영조 34년(1758) 11월에 쓰여진 것으로 문서 제목은 ‘영방입안(營房立案)’이다.‘영방’은 각 군영(軍營)이나 도(道) 단위 감영(監營)에서 관리가 집무를 보던 관청을 말하며,‘입안’은 판결문·공증서와 같은 일종의 공식 문서다.
짐짓 근엄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 문서에서도 선배들의 짓궂음은 여전하다.문서는 ‘풀벌레[草蟲] 정국량은 면신례를 관례대로 한 차례 시행했고 이에 의거해 입안을 발급해준다.’고 기록하고 있다.아마도 면신례 뒤 술에서 깬 다음 이같은 문서를 작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토지박물관 김성갑 학예연구사는 “‘정양 면신첩’은 기존의 김종철 면신첩과 유사하지만,‘정국량 면신입안’처럼 공식문서 형식을 띤 자료는 유례가 없다.”면서 “당대에도 극심한 폐해가 지적돼 국법으로 금해왔던 면신례 방식이 18세기 중반 무렵 변한 것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조선시대 면례식은 초기의 미풍양속에서 벗어나 금품을 갖다바쳐야 하거나 후배가 선배에게 맞아 죽기도 하는 등 폐해가 극심한 것으로 알려졌다.조선 선조 때부터 국법으로 태형 또는 유배를 보내는 등 엄격히 금지했지만 계속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2008-12-11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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