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들이 서울에 오면 놀라는 것이 많다. 고층 아파트가 촘촘히 들어선 것을 보고 놀란다. 디자인의 단조로움에 더욱 질린다. 좁은 공간이라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지만 핑계거리가 되지는 못한다.
이성형 외교안보연구원 객원교수
수려한 산세에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이지만, 외국 도시들과 비교하면 문화적 역량에 한계를 느낀다. 아파트 천국을 꿈꾸었던 르 코르뷔지에가 모스크바에서도 실현하지 못했던 꿈을 서울이 실현한 것이다.
시멘트 건물은 오래되면 빛바랜 슬럼가의 풍경이 된다. 서울의 미래는 런던이나 파리보다는 브라질리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속도전과 기능주의의 대가일 것이다.
가끔 최고경영자과정에 강의를 가면 보는 풍경이다. 검은색 정장의 기사, 검은색 자동차, 검은색 양복의 중년 남자, 여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엘리트들은 어두운 색조를 좋아한다.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폭탄주도 한 잔씩 나눠 마신다. 이런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인테리어와 칙칙한 색조 속에서 아이들은 자란다. 아파트와 학원을 왔다 갔다 하는 아이들에게 무슨 예술적·문화적인 감수성을 이야기하겠는가?
경제가 위기라고 한다. 공적 자금을 풀어서 돈이 돌게 해야 한다고 한다. 건설 공사에 돈을 푸는 것은 한편으로 이해가 간다. 건설사도 살리고 일자리를 창출하겠지만, 그 돈은 결국 땅 속에 스며들고 물길 따라 흘러갈 뿐이다.
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우리 일상과 밀접한 경관에, 문화 사업에 풀면 아니 되는 것일까? 툭하면 문화입국 운운하는데.
1930년대 미국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공황기 미국도 댐 공사를 했다. 하지만 대규모 재원을 동원하여 문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소위 ‘뉴딜 문화 프로그램’이다.
프 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5년에 오랜 측근인 해리 홉킨스를 지명하여 대규모 고용 구제 프로그램으로 공공사업진흥청(WPA)을 만들었다.
‘페더럴 원’이라 불린 프로젝트는 미술·음악·연극·작가·역사기록 등 5개 분야로 구성되었다. 총 4만명의 문화 사업 관련자들이 이 공공예술(퍼블릭 아트) 프로그램으로 밥벌이를 했다.
미국의 문화적 경관을 대규모로 변화시키는 문화입국이 프로젝트의 목표였다. 예술가들은 이웃 멕시코에서 벌어지고 있던 벽화예술 운동에 감동을 받았다.
절정기였던 1936년에 5300명의 예술가들이 고용되어, 공공건물에 2500점 이상의 벽화를 그렸고, 그림 10만 8000점, 조각 1만 8000점을 남겼다. 난민촌과 마을회관에 만든 미술학원에서 5만명의 아이와 성인이 무료로 미술교육을 받았다.
음악가 1만 6000명도 일자리를 얻었다. 오케스트라·실내악단·합창단·오페라단이 구성되어 매주 300만명의 관객 앞에서 5000번의 공연을 행했다.
입장권은 대단히 싼 가격에 팔았다. 1939년의 경우 27개 주에서 13만 2000명의 어린이들이 매주 무료로 음악 교습을 받았다. 1500명의 작곡가는 5500곡을 남겼다.
연극인들도 절정기에 1만 2700명이 혜택을 받았다. 작가들은 6686명이 고용되었다. 작가들이 기록한 ‘아메리칸 가이드 시리즈’는 오늘날에도 인용되는 가장 포괄적인 미국 대백과사전이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노벨문학상 작가 솔 벨로, 영화인 오손 웰스, 버트 랭카스터, 팝아티스트 잭슨 폴락, 작곡가 에런 코플랜드도 이 프로그램의 수혜자였다.
심지어 멕시코 벽화가인 리베라, 시케이로스, 오로스코도 혜택을 받았고,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칭송하는 벽화들을 미국의 공공건물에 남겼다. 우리도 이 위기를 문화입국의 기회로 삼을 수는 없을까.
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우리 일상과 밀접한 경관에, 문화 사업에 풀면 아니 되는 것일까? 툭하면 문화입국 운운하는데.
이성형 외교안보연구원 겸임교수
이성형 외교안보연구원 객원교수
수려한 산세에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이지만, 외국 도시들과 비교하면 문화적 역량에 한계를 느낀다. 아파트 천국을 꿈꾸었던 르 코르뷔지에가 모스크바에서도 실현하지 못했던 꿈을 서울이 실현한 것이다.
시멘트 건물은 오래되면 빛바랜 슬럼가의 풍경이 된다. 서울의 미래는 런던이나 파리보다는 브라질리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속도전과 기능주의의 대가일 것이다.
가끔 최고경영자과정에 강의를 가면 보는 풍경이다. 검은색 정장의 기사, 검은색 자동차, 검은색 양복의 중년 남자, 여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엘리트들은 어두운 색조를 좋아한다.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폭탄주도 한 잔씩 나눠 마신다. 이런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인테리어와 칙칙한 색조 속에서 아이들은 자란다. 아파트와 학원을 왔다 갔다 하는 아이들에게 무슨 예술적·문화적인 감수성을 이야기하겠는가?
경제가 위기라고 한다. 공적 자금을 풀어서 돈이 돌게 해야 한다고 한다. 건설 공사에 돈을 푸는 것은 한편으로 이해가 간다. 건설사도 살리고 일자리를 창출하겠지만, 그 돈은 결국 땅 속에 스며들고 물길 따라 흘러갈 뿐이다.
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우리 일상과 밀접한 경관에, 문화 사업에 풀면 아니 되는 것일까? 툭하면 문화입국 운운하는데.
1930년대 미국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공황기 미국도 댐 공사를 했다. 하지만 대규모 재원을 동원하여 문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소위 ‘뉴딜 문화 프로그램’이다.
프 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5년에 오랜 측근인 해리 홉킨스를 지명하여 대규모 고용 구제 프로그램으로 공공사업진흥청(WPA)을 만들었다.
‘페더럴 원’이라 불린 프로젝트는 미술·음악·연극·작가·역사기록 등 5개 분야로 구성되었다. 총 4만명의 문화 사업 관련자들이 이 공공예술(퍼블릭 아트) 프로그램으로 밥벌이를 했다.
미국의 문화적 경관을 대규모로 변화시키는 문화입국이 프로젝트의 목표였다. 예술가들은 이웃 멕시코에서 벌어지고 있던 벽화예술 운동에 감동을 받았다.
절정기였던 1936년에 5300명의 예술가들이 고용되어, 공공건물에 2500점 이상의 벽화를 그렸고, 그림 10만 8000점, 조각 1만 8000점을 남겼다. 난민촌과 마을회관에 만든 미술학원에서 5만명의 아이와 성인이 무료로 미술교육을 받았다.
음악가 1만 6000명도 일자리를 얻었다. 오케스트라·실내악단·합창단·오페라단이 구성되어 매주 300만명의 관객 앞에서 5000번의 공연을 행했다.
입장권은 대단히 싼 가격에 팔았다. 1939년의 경우 27개 주에서 13만 2000명의 어린이들이 매주 무료로 음악 교습을 받았다. 1500명의 작곡가는 5500곡을 남겼다.
연극인들도 절정기에 1만 2700명이 혜택을 받았다. 작가들은 6686명이 고용되었다. 작가들이 기록한 ‘아메리칸 가이드 시리즈’는 오늘날에도 인용되는 가장 포괄적인 미국 대백과사전이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노벨문학상 작가 솔 벨로, 영화인 오손 웰스, 버트 랭카스터, 팝아티스트 잭슨 폴락, 작곡가 에런 코플랜드도 이 프로그램의 수혜자였다.
심지어 멕시코 벽화가인 리베라, 시케이로스, 오로스코도 혜택을 받았고,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칭송하는 벽화들을 미국의 공공건물에 남겼다. 우리도 이 위기를 문화입국의 기회로 삼을 수는 없을까.
왜 살아 있는 사람에게, 우리 일상과 밀접한 경관에, 문화 사업에 풀면 아니 되는 것일까? 툭하면 문화입국 운운하는데.
이성형 외교안보연구원 겸임교수
2009-01-0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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