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한국판 벤틀리법/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씨줄날줄] 한국판 벤틀리법/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안미현 기자
입력 2023-04-20 01:54
수정 2023-04-20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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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미국 미주리주에 사는 세실리아 윌리엄스는 아들 부부가 음주운전 차량에 목숨을 잃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제대로 울 수조차 없었다. 다섯 살 난 손주 벤틀리와 세 살 메이슨이 말간 눈으로 할머니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두 손주를 키울 일도 막막했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미국 전역의 입법권자들에게 전화를 걸고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다른 가족에게 똑같은 고통을 줄 수 없다”고.

올해 1월 미국 테네시주가 처음 시행한 벤틀리법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음주운전 사고로 부모를 잃은 자녀의 양육비를 가해자가 책임지게 하는 법이다. 다른 20여개 주에서도 입법 절차가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음주운전으로 미성년자의 부모를 숨지게 한 사람을 ‘양육비 채무자’로 추가하거나(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음주운전 가해자가 피해자의 미성년 자녀 양육비를 배상하도록 하는(정우택 국민의힘 의원) 등의 법안이 최근 잇따라 발의됐다. 도지사가 피해 아동 지원을 책임지게 한 제주도의회는 21일 관련 조례의 본회의 의결을 앞두고 있다.

얼마 전 떡볶이 배달을 나갔던 40대 가장도 음주 차량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세 아이 아빠였다. 그런데 이 법안들은 가해자의 경제력이나 피해자의 자녀 유무에 따라 형평성이 갈리는 문제를 안고 있다. 사망 못지않게 경제적 타격이 큰 중증 후유장애 피해자의 자녀도 도움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가해자의 직접 보상보다 기금 조성이 낫다는 목소리도 있다.

연체하면 여권까지 빼앗을 정도로 양육비에 엄격한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빠져나갈 구멍이 많아 강제성도 보강해야 한다. 아이가 몇 살이 될 때까지 지원할지도 정해야 한다. 테네시주는 18살이지만 미주리는 21살, 하와이는 23살까지로 추진 중이다. 모처럼 여야 모두 도입에 이견이 없는 만큼 차분한 토론을 통해 한국판 벤틀리법이 조속히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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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틀리 할머니의 말처럼 “누구도 부모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그리고 “행동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해야 한다.”
2023-04-2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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