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고우영 선생이 타계하셨다. 어릴 때 고우영 선생이 그린 ‘느티나무 도둑’이라는 만화를 보고, 이렇게 문학적이고 예술성이 강한 만화라면 세상이 만화를 경멸하든 말든 나도 만화를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비록 선생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나를 만화계로 이끈 몇 분 안 되는 작가 중 한 분이시다. 선생을 보내고 난 다음날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에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있다 보니 이래저래 마음이 울적했다.
이미지 확대
닫기이미지 확대 보기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성장한다지만 사실은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영원한 삶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고 유한의 삶을 향해 가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도 탄생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죽음은 슬픈 일이다. 산다는 것은 눈이 시리도록 눈부신 것이지만 또한 눈물겹도록 슬픈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가끔 터무니없는 얘기를 두고 ‘만화 같은 얘기’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인생이야말로 만화 같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만화는 꿈처럼 황당한 이야기일 뿐이고 인생은 현실의 삶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러나 세상살이는 만화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 실제로 만화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소재가 무엇이든 간에 만화가 주로 다루는 이야기는 성장 드라마이다. 주인공이 소림사에 가 있든, 안드로메다 성운에 가 있든, 또는 암흑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태초의 전설 속에 가 있든 그 주인공은 갖은 역경과 고난을 뚫고 성장해 나간다. 그 성장드라마 속에 빠지지 않는 성공의 요소가 우정과 야망, 사랑과 승리이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요소를 눈물과 분노와 웃음으로 버무려 나가는 것이 만화다. 만화 속의 주인공은 어떤 역경 앞에서도 카리스마와 웃음을 잃지 않고 어떤 적과 분노 앞에서도 슬픈 눈을 잃지 않는다.
고우영 선생의 삶은 한편의 만화다. 광복 전에 하필이면 옛 고구려의 땅인 만주에서 태어난 것도,6·25때 피란오면서 온 가족이 남이냐 북이냐의 생사의 갈림길을 선택해야 했던 것도, 일찍 요절한 천재 만화가인 형을 따라 만화계에 뛰어든 것도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다.
시대보다 작품이 앞질러 가서 어린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던 선생은 젊은 날을 고독하고 치열한 삶으로 보냈다.
이런 삶이라면 마땅히 외롭고 지친 모습을 보여야 했을 테지만 선생은 웃음보따리였다. 누구보다 낙천적인 성품에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누구든지 만나면 단번에 허물허물하게 만들어버렸다. 거기다 스포츠라면 무엇이든 만능이었으니 선생이야말로 어떤 역경 앞에서도 카리스마와 웃음을 잃지 않는 만화 속의 주인공이었다.
이렇듯 해학과 풍자의 대가였던 선생은 1980년대 스포츠신문에 성인만화 ‘임꺽정’을 연재하면서 한국 성인만화의 장을 열었고 불같은 열정으로 눈을 감기 전까지 작품을 발표했다.
고우영 선생은 가장 만화 주인공 같은 모습으로 가장 만화 같은 삶을 살다가 가신 분이다. 그래서 선생의 삶에서는 따라하고 싶은 유혹의 향기가 있다. 어차피 인생이 허구가 아니라서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라면, 고우영 선생처럼 온갖 매력으로 무장한 만화의 주인공이 되어서 자신의 인생을 한편의 드라마로 만들 수 있다.
어차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다. 멋지게 채색된 만화 같은 인생을 산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내 끝은 언제쯤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다 보니 30년 만화가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누구나 그렇듯이 분명 내 인생도 싫든 좋든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다. 엔딩이 좋으면 드라마는 성공한다.
<만화가>
2005-05-18 22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재명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며 보건복지부에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탈모를 질병으로 볼 것인지, 미용의 영역으로 볼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권과 의료계, 온라인 커뮤니티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당신의 생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