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중역들 중에는 세련된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이 돋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기업 세계라는 정글에서 긴 세월 치열한 생존경쟁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외교적 언어가 몸에 밴 것이다. 비즈니스 언어는 일상 언어와는 달리 이해관계의 조율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만큼 전략적이고 논리적인 화법을 추구한다. 특히 사안이 중대하고 예민할 경우 메시지는 사전에 계산되고 전략성이 가미되며 외교적인 수사로 포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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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정 크레디트 스위스 기업커뮤니케이션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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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정 크레디트 스위스 기업커뮤니케이션 이사
선진 기업은 대외 커뮤니케이션에서 정제된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많은 고민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보도자료나 CEO의 입을 통해 발표되는 내용은 사전에 경영진,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사내 변호사의 협력과 논의를 거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중요한 협상을 벌일 때, 민감한 이슈를 논할 때, 커뮤니케이션의 결과가 미칠 파장이 조심스러울 때 우리는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한다. 같은 메시지라도 어떤 표현을 선택해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메시지의 적정성과 효과는 달라진다. 비록 가식일망정 가급적 노골적인 비난이나 편견은 드러내지 않고 정중한 모양새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외교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CEO의 취임사, 감원이나 인수·합병(M&A) 발표,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해명자료 등에는 특히 외교적 수사가 많이 등장한다. 이를 얼마나 호소력 있게 전달할지는 CEO의 몫이다. 혹자는 이제 스타 CEO의 시대는 지났다고 주장할지 몰라도 여전히 기업의 대변인 역할은 상당 부분 CEO 몫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CEO는 그 자체로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브랜드 가치의 상징이다.
직설적 화법을 피하는 가장 대표적인 커뮤니케이터로는 외교관을 꼽을 수 있다. 외교관은 국가간 첨예한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국익을 대변하는 입장인 만큼 표현의 수준과 수위를 늘 예민하게 의식하고 조절한다.
‘리더는 실용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여야 하지만 비전가와 이상주의자의 언어를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재임기간 내내 끊임없이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화법을 지켜보며 난 늘 이 격언을 떠올리곤 했다.
비전가와 이상주의자의 언어는 적어도 그런 세속적인 언어나 거친 직접화법보다는 나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말이 새로운 각성과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 말에 담겼던 진정성이 마음을 움직이고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 과잉의 시대. 하지만 소통엔 목마른 역설적 시대를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지나치게 계산된 메시지와 식상한 간접화법에 갇혀 버렸는지 모른다.
완벽하게 포장된 기업의 메시지도 결국 그 메시지에 담긴 진심이 외교적인 수사보다 단단할 때 진정 빛을 발할 수 있다. 진정성과 외교적 언어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간접화법과 직접화법이 여유롭게 어우러지는 커뮤니케이션의 묘가 절실한 때다.
언어는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그 무서운 힘을 알기에 우리는 외교적 언어의 미덕을 이해한다.
언어는 내 의지를 초월한다. 나를 떠난 순간부터 무수한 타자의 관점과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굴절되고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무서운 힘을 알기에 우리는 영리한 커뮤니케이터가 되기를 원한다.
매일매일 개인도, 기업도, 정부도 수도 없이 외교적 언어가 필요한 순간을 만난다. 하지만 때로는 그 말을 전하는 이의 진심이나 눈빛이 외교적 언어를 압도한다. 진정성은 외교적 언어보다 훨씬 힘이 세다.
박현정 크레디트 스위스 기업커뮤니케이션 이사
2009-06-0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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